주말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찌 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주말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학교를 다녔고 또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니는 것만큼은 이제 정말 자신이 있어진 순간에 애석하게도 나는 취업을 했다. 잠깐씩 찾아오는 방학이나 휴가가 내 곁을 떠나도 내게는 주말이 있었다. 주말만을 기다리며 일한다. 내가 주말을 계속해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계속 이렇게 평일에 일해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널 위해 뭘 못하겠니) 주말에 닿기까지는 월화수목금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5일 내내 주말을 떠올린다. 인스타그램에서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장소를 찾게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주말을 생각한다. 이것이 어떻게 사랑이 아닐 수 있을까. 주말 만세! 주말 최고! 주말도 분명 나를 사랑해.
주말이 된다고 해야 할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말에야만 처리할 수 있는, 주말 전용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말이 좋은 이유는 그 모든 일들의 스케줄을 내 통제 하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약속을 잡을 수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원하지 않는 약속이 생길 것 같으면 적당히 아픈 척을, 아니면 적당히 바쁜 척을 할 수도 있다. 가고 싶었던 식당에서 한 끼를 든든히 채울 수 있고, 만약 내가 진짜 원한다면 웨이팅을 할 수도 있다.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기 때문에, 첫 끼로 먹은 게 아침이고 자연스럽게 그다음 끼니가 점심이다. 세 번째 끼니는 저녁이고, 네 번째 끼니는 2차가 될 것이다.
카페에 가서 할 일을 한다. 급한 경우에는 업무를 보고, 요즘에는 지금처럼 글을 써보려고 한다. 영어 사전이 없으면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출퇴근 지하철 길에서는 결코 펴볼 수 없었던 원서를 읽는다. 스포티파이에 들어가서 음악을 튼다. 괜히 평소에 안 듣던 Parcels를 듣는다. 더콰이엇의 새 앨범을 듣는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도쿄의 어떤 카페에서 틀어주는 바이닐 세션 영상을 튼다. 다음에 일본을 가게 되면 저 카페에 꼭 가보리라 다짐한다.
오늘 온 동네 카페는 항상 오던 카페가 아니기에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처음 온 나를 위해 비워둔 것만 같은 창가 자리에 앉으니, 이 동네가 나를 위해 재생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여러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스트레칭을 하는 어르신이 보이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포메라니안이 보인다. 엄마에게 달려가는 어린아이가, 어딘가 바삐 걸어가는 나의 또래가 보인다. 그러다 반대로 내가 앉아있는 이 카페를 궁금해하는 누군가가 나를 보면, 혹여나 너무 심각해 보였을지도 모르는 내 표정을 풀고 다시 점잖게 노트북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 창가 자리가 나의 0,0,0,0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예매한다. 보고 싶은 영화의 상영관이 몇 개 없을 때에는 그 영화의 상영 시간이 하루 스케줄의 중심이 된다.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상쾌한 기분이 든다. 사운드트랙이 좋았던 영화였다면 사운드트랙을 들으면서 걷는다. 해가 지고 있을 때쯤이면, 왜인지 나와 내가 있는 이 거리를 배경 삼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럼 나는 이렇게 총평한다. 저번 주말이 그랬듯, 이번 주말도 꽤 나쁘지 않았다고.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주말이지만, 때로는 이유 모를 죄책감과 함께 주말에 깨어나기도 한다. 주말의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있는데, 내가 그 키를 잡지 않으면 나는 가능한 만큼 침대에서 그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역시 나의 선택이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느끼는 이 죄책감의 근원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더 이상 과음을 해서는 안 되겠다’ 등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런 날이면, 난 햇빛이 나를 더 강하게 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마치 이런 말을 하듯 강하게.
“실체가 없는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책이나 커피나 펜을 들라고. 음악을 들으라고. 내 곁을 지나가는 일상적인 순간을 영화처럼 감상하고, 잠깐 현실을 잊고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를 현실처럼 대하라고. 주말만큼은 여유를 가지라고.”
그런 말을 하면서 점점 중천으로 향하는 해가 얄미워, 너가 점점 나를 내려다보는데 어찌 여유를 가질 수 있겠냐고 따져 묻겠지만. 결국 그렇게 몸을 일으키겠지.
또, 이유 있는 불안감에 잠에 들지 못하는 일요일도 주말의 모습이지만, 그조차도 사랑해야겠지. 개그콘서트 엔딩 곡 연주를 멍하니 바라보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여러 번 학습한 이별이지만, 난 여전히 미숙하다.
주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주말이 아닌 날들을 미워하게 되었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 반대였을지도 모르지. 평일이 너무 싫어, 평일이 잠깐 사라졌을 때 주말과 눈이 맞아버린 거야. 미움의 반대급부 격으로 시작한 수동적인 사랑이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졌으니 뭐 어때. 미움을 없앨 수 없다면 사랑을 키울 수밖에. 수줍은 고백이고 싶었던 이 글이 광신도의 찬양처럼 읽히는 한이 있어도 나 계속해서 낯 부끄럽게 표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