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의 모든 희망을 내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어떤 강력한 동기에 이끌려 정신과 육체가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집는 책마다 술술 읽히고, 퇴근길에 스치는 하나의 표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밤늦게까지 글을 쓰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매번 듣던 노래에서 이전에 찾지 못했던 새로운 감흥을 느꼈고, 오래 연락이 끊겼던 친구에게 충동적으로 안부를 물었다. 여행지에 가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러닝을 하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내 인생에 취해 하이가 온 것이다. 경험적인 데이터가 이것은 한순간이라고 경고했고, 섭섭하게도 정말 그랬다. 고통을 마비시키는 출처 불명의 어떤 물질에 노출되었던 시기가 끝났고, 서서히 마취가 풀리기 시작했다. 활자만 봐도 매스껍고, 노이즈캔슬링된 음악도 소음처럼 느껴진다. 나는 언제나처럼 내가 또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앞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들의 원동력이 궁금해진다. 그들은 갖고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쉽게 지치는 인간이었던가. 지치지 않고 매일매일을 살아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세상에 태어나 우는 것도 지친 나머지, 너무 빠르게 씩씩해져 버린 것이다. 이제는 매일 씩씩해야 하는 게 너무 지쳐서 울고 싶은데 말이다.
내 주변에도 꾸준하게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쾌활하게 살아가는 존경스러운 인물들이 더러 있다.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인지, 24시간 가동되는 에너지 발전소가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 그들은 대체로 머릿속 영감을 타인 앞에서 발산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가끔은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남의 말에 경청할 줄 알지만 휘둘리지는 않는다. 그들의 예민함은 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예술적인 섬세함이 필요할 때만 한정적으로 발휘되는 것 같다. 지칠 때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는 ‘이걸 왜 하는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질문에서 그들은 영원히 자유로워 보인다. 하루하루가 언젠가 완성하게 될 큰 그림의 밑그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애초에 큰 그림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그 질문으로부터 자유롭고, 매일을 확신에 가득 찬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절대 될 수 없기에 되고 싶은 인간상에 대한 판타지다. 다소 수상할 정도로 그들을 유심하게 관찰해 본 결과 그들도 나와 똑같이 지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단지 바닥을 받아치는 속도가 빨라 얼핏 보기에는 그 틈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보다 느리게 소모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빠르게 회복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매 순간 취해있던 사람이 아니라, 오늘 밤 걸쭉하게 취해도 다음날 밤이 오기 전에 숙취를 해소하고 다시 취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크게 감명받았다. 그들과 같은 속도로 회복하겠다는 욕심도 없었고, 그들의 회복에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치는 일이 생기면, 기도를 하듯, 어쩌면 주문을 외듯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나는 공이다. 나는 공이다. 나는 아주 둥글고 매끈한 공이다. 나는 떨어지면 튀어 오르는 공이다. 이왕이면 탄력성도 좋은 공식 대회 공인구 같은 거다. 바닥이 딱딱할수록 더 잘 튀기는 공이다. 조금이라도 각이 지는 순간 나는 바닥에 꽂힌다. 그래서 난 각이 지지 않은, 아주 매끈하고 아름다운 ‘구’ 형태의 공이다."
오랜만에 3시간 이상의 낮잠을 청한 주말이었다. 하루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나. 나는 그저 공의 마음가짐으로 집을 나선다. 내가 좋아하는 낚시꾼이 쓸 것만 같은 캡모자를 뒤집어쓰고 텁텁한 여름 저녁의 공기를 건넌다. 카페에 들어가서 책을 펼친다. 나를 여전히 거부하는 활자에게 사근사근 말을 걸어본다. (원래가 반대가 되어야 하는 관계인데 말이다) 글들이 다시 내게 온다. 어떤 표현이 수줍게 나를 찾아온다. 나는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저 가시를 돋우기보다는 매일 하는 일을 똑같이 하면서 매끈한 공이 되기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