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횡단 크루즈에 머문 지 대략 2주 정도가 지났다. 처음엔 멀미를 했는데 약을 먹으니 괜찮아져 문제없이 배 안의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었다.
크루즈 안에서는 기본적인 식음료를 먹을 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삼시세끼 뷔페식사나 애피타이저-메인디쉬-디저트로 구성된 정찬식사, 디저트류, 과일 등이 모두 무료이다. 음료 역시 에이드, 커피, 등 기본적인 음료들 모두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다. 물론 조금 더 높은 퀄리티의 식사나 콜라 등의 음료, 술 등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우리가 구매한 크루즈 승선권 패키지에는 높은 퀄리티의 식사 3번과 15달러 이하의 주류 무제한 옵션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는 음료와 술은 대부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돈이 충분하지 않아 하루에 한 끼 먹는 날도 있었을 정도로 배고픔을 참으며 한 달 가까이 여행한 후 마주한 상황이기에 처음엔 너무나 행복하게 크루즈 내 식사를 즐겼다. 모든 음식이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메뉴들이 랜덤 하게 분포돼 있어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어보며 입에 맞는 음식들을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이런저런 술들 역시 주문해 보며 어떤 게 우리 취향인지 체험해보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가 크루즈 안에서 먹는 것 말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크루즈 안에선 승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이것저것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 특히 각종 무료 프로그램 및 공연들이 많았는데 처음엔 이것저것 보러 다녔으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지루할 수밖에 없는 공연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쇼핑구역은 어차피 사지는 못해 몇 시간 둘러보니 끝이었고 기타 돈을 내야 하는 액티비티들은 꿈도 못 꿨다.
돈을 충분히 가져와 액티비티라도 즐겼다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와서 공연들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란 후회는 해도 당장 달라지는 게 없기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즐거움인 먹는 즐거움만 느끼게 됐다.
기상하자마자 아침을 먹는다. 먹고 와서 핸드폰 보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일어나 점심을 먹는다. 방을 청소하는 동안 할 거 없나 어슬렁거리다 라운지에 가 디저트에 각종 주류를 곁들인다. 청소가 끝날 때쯤 방에 들어가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저녁 먹고 핸드폰보다 잠들었다 일어나면 아침을 먹는다. 이렇게 우리는 2주 크루즈 여행을 보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았나? 그건 아니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먹고 자고 싸고만 하는 사육당하는 삶은 너무나 행복했다. 다만 사람이 너무나 나태해진다. 도파민에 절여져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상태가 된다. 그냥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멍한 상태가 된다. 당장의 눈앞 먹을 것만 생각하게 되고 당장의 핸드폰 속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문득 이런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올해 만으로 28살이다. 사회에 나와 경제활동을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 덕분에 내 친구들 중엔 백수가 아직 꽤나 많다. 그리고 그 백수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하나같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의 크루즈생활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수 있는 집 공짜. 식음료 공짜. 돈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콘텐츠 없음. 백수입장에서 부모님 집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태하게 사는 사람보고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지금 저러고 있는 게 당장 잘 곳과 먹을게 나오니까 저러고 있는 거라고. 당장에 라면하나 사 먹을 돈 없으면 알아서 돈 벌러 나가게 돼있다고. 그 말에 무척이나 동감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했고, 대학생 때부터 학업과 일을 병행해 왔기에 부모님 밑에서 사는 백수들의 감정상태를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이제는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다. 취업을 안 해도 살만하니까 집에서 눈칫밥 먹더라도 그냥 사는 것이었다. 오늘 글의 결론이 어쩌다 이렇게 났는진 모르겠다만 오랜만에 친구들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다. 오지랖이지만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분들 중에 부모님 집에서 사는 백수가 있다면 직장을 구하기보다 독립을 먼저 하는 것을 추천한다. 혹은 집에서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라는 말만 반복하며 밥만 축내는 자식이 있다면 일단 내보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