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람들은 진짜 우산을 안 쓸까?

by 정창윤

2024. 11. 19.

런던, 영국




긴 항해를 마치고 런던에 도착한 지 3일째다. 미국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한여름의 날씨였는데 도착하니 한겨울 날씨라 패딩을 꺼내 입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악명이 높은 런던답게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비가 내리고 있다. 작은 접이식 우산을 하나 챙겨 오긴 했으나 겨울옷을 입은 두 명의 성인 모두 커버하기는 힘들어 밖에 나가려면 옷의 절반 즈음은 젖는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나는 평소에도 비가 올 때 밖에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우산을 써도 옷이 젖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신발까지 젖어 하루종일 찝찝한 상태로 지내야 하며 우산을 든다고 손 하나로 다녀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오늘도 나는 나가기가 무척 귀찮았고, 이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아내는 평소와 같이 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왔다. 어쩔 수 있나 뭐. 일주일이나 런던에 있는데 오늘 말고 다른 날도 많다고 설득해 봤으나 다른 날에도 비가 오면 일주일 내내 숙소에만 있을 거냐는 반박에 다시 반박할 말이 없었다. 3일의 경험상 런던의 일기예보는 신뢰도가 부족해 미래의 날씨를 예측할 방법이 없어 아내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 반박할 말이 있었어도 아내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긴 했다.


예상과 다름없이 오른쪽 어깨가 젖어가기 시작했고, 하필 바람도 강하게 불어 바지도 함께 무거워져 갈 때쯤 내구성이 좋지 않은 접이식 우산답게 우산이 계속 뒤집혔다. 한 방향으로 걷고 있어도 바람 방향이 신기하게 앞뒤좌우 번갈아가며 불어와 우산 방향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힘겹게 빗길을 뚫고 간신히 근처 카페에 도착해 한숨 돌리며 주문 후 2층 창가자리에 착석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달달한 빵을 먹으니 마음의 여유가 점점 생기며 그제야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비가 막 폭우처럼 쏟아진 건 아니긴 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다닐 만큼 적게 내리지도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모두가 우산을 쓰고 다니고, 우산이 없는 사람은 뛰어다녔을 정도의 비의 양은 됐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들 우산을 쓰지 않고 다녔다. 물론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꽤나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쓰지 않았다. 여행오기 전 카더라로 런던사람들은 우산 잘 안 쓴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이 광경을 실제로 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캐주얼하게 입은 사람들만 안 쓰는 것도 아니고 정장차림이거나 코트를 입은 사람들도,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들도 다 같이 비를 맞고 다녔다. 람들 머리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찝찝했다.




수십 분째 그냥 비를 맞으며 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문득 대학생시절 자동차 부품 포장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할 때가 떠올랐다.


자동차 부품이다 보니 포장해야 하는 부품 종류가 꽤나 다양해서 박스 종류 역시 엄청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4~5명씩 팀을 이뤄 하루에 꽤나 많은 양의 종류의 부품을 포장했는데, 부품의 종류가 바뀔 때마다 박스가 있는 구역에 가서 부품에 맞는 박스를 작은 수레에 실어 가져와야 했다. 생각보다 그 행위가 귀찮아 나 같은 막내급들이 2인 1조로 항상 다녀오곤 했는데 어느 날 어쩌다 고참급이랑 함께 박스를 가지러 가게 되었다. 대충 보니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될 양의 박스였다. 고참 형님의 지시로 수레 위에 가져갈 박스를 쌓는데 이대로 수레를 끌면 무조건 가져가다 박스가 쏟아질 것 같음에도 끝도 없이 한 묶음 더를 외치셨다. 한 번에 가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이거 안된다고. 가다가 무조건 위에 있는 박스들 떨어질 거라고 말씀드렸을 때, 그때 형님이 했던 말이 아직 기억이 난다. 떨어지면 주우면 되지.


사실 별거 아닌 말이기도 하고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 형님은 그냥 빨리 가자고 큰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공장일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실수하지 않게, 돌아가지 않게 과하게 조심하며 살아오던 어린 나에게는 꽤나 혁신적인 말이었다. 물론 수레를 끌고 가다 박스는 당연히 쏟아졌다. 하지만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박스를 주워 다시 수레에 싣고 가져가니 안전하게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애초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니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드는 스트레스를 안 받은 것도 덤이었다. 그 형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그 사건 이후로 삶을 대하는 내 태도는 꽤나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상 런던 사람들에게 비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젖을까 걱정하고, 비가 언제 올지 모르니 우산을 항상 가지고 다니고,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오면 스트레스받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냥 젖으면 말리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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