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함께하자는 메일을 받는 건 언제나 반갑다.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어 제안해주신 거라 생각하며, 이번에는 부디 순조롭게 진행되길 기대해본다.
그림을 시작했을 때는 좋아하는 것만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에 몰두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좋아하는 색과 선으로 화면을 채워가는 그 시간이 그저 행복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타인을 위한 그림’을 마주했을 때, 많이 낯설었다. 펜을 쥐고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렇게 그려도 괜찮을까?’
‘이런 분위기를 바라는 걸까?’
하지만 그런 고민 덕분에 새로운 대상이나 익숙하지 않은 구도, 써보지 않았던 색감에도 차츰 도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은 예상보다 더 괜찮은 모습으로 나왔다.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시선이 담겨 있었고, 그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그림이 조금씩 자라나는 걸 느낀다. 가끔은 완성된 그림을 보며 ‘이게 내가 그린 게 맞나?’ 싶을 때도 있다. 스스로도 신기하고, 어쩐지 살짝 자랑스럽다. 한층 더 단단해진 그림을 보며 ‘앞으로 내 작업에도 이런 시도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2017년, 1년간 맡았던 [롯데 하이마트 사보 표지 일러스트 작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1월호의 채색본을 보낸 뒤 “그림에 동물을 한 종씩 넣어보면 어떨까요?”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럼 더 생동감이 느껴질 것 같다고. 그때부터 사보 일러스트 12컷 모두에 다양한 동물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토끼, 참새, 고양이, 나비…
이번에는 어떤 동물을 넣을까 고민하며 그리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고, 완성된 그림도 확실히 더 살아 숨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개인 작업에도 동물이나 곤충 같은 작은 생명체를 꼭 넣으려 한다. 그 하나가 그림 속 분위기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때 배웠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2020년 현대건설 사보 표지 일러스트 작업]이다.
이 작업 역시 1년 동안 이어졌고, 다양한 건축물을 여러 구도로 그려보았다.
주로 자연 풍경을 그리던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지만, 그만큼 색다른 도전이었다.
한편, 내 그림체와는 전혀 다른 표현법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일단 도전해본다. 생소한 스타일로 그려낸 그림이 괜찮으면 작업 반경이 넓어진 것 같아 성취감도 두 배로 커진다.
물론 늘 만족스러운 결과만 나오는 건 아니다. 그럴 땐 아쉬움이 남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그림을 클라이언트가 기분 좋게 받아들였는지 여부니까. 흐뭇한 반응을 얻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작업료 입금만 제때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돈 이야기를 하려니 괜히 조심스러워지지만, 프리랜서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다. 정해진 날짜에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아니다보니, 페이 지급일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정산이 되면 참 좋을 텐데, 개인 의뢰가 아닌 이상 몇 주가 지나야 돈이 들어온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아, 그동안은 좀처럼 안심이 되질 않는다. 문득, 회사원인 동생이 부러워진다.
그림이 ‘일’이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 부족함 덕분에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사실.
‘취미가 일이 되면 괴로워진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고 싶었던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면, 언젠가 그 일이 싫어질 수도 있다고.
'취미'가 ‘일’이 된 지 어느덧 12년,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기분이 상한 적은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림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