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는 처음입니다만

여행의 시작

by 찬희

오전 열한 시, 아빠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가 끓인 누룽지의 구수한 냄새가 났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낯선 숙소의 식탁에 앉아서는, 기어코 한국에서 가져온 매운 멸치볶음을 곁들여 누룽지를 한 숟가락 떠먹는다.


첫날 아침 특유의 분주한 준비가 끝나고, 대문을 열어 캐나다의 아침을 맞이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콧속으로 햇살을 머금은 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기분 좋게 볼갗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도 느껴진다. 숙소 앞 작은 잔디길을 따라 정원으로 걸어 나오면, 아직 붉은 물이 들지 않은 푸른 단풍나무가 여름을 머금고 있었다.


여름 단풍


밴쿠버 시내까지 가기 위해서는 시버스(Sea Bus)를 타러 40분을 걸어가야 했다. 집을 나오자 우리 집 이층 테라스에서 집주인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주인분이 길을 대강 알려줬지만 길치인 나는 지도에 코를 박은 채 터미널로 걸어가야 했다. 내 뒤에는 우리 가족 세 명이 쪼르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특히 아빠는 내게 ‘가이드’라며 장난스레 나를 따라왔다.


터미널에 다 와서는 워터프론트 공원 너머로 밴쿠버의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제주도의 돌하르방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돌하르방을 닮은 석상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천항과 밴쿠버항 간의 우호관계를 기념해 만든 진짜 돌하르방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견이었기에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캐나다에서 제주도를 보다니.


시간이 촉박했기에 우리는 곧바로 터미널로 향했다. 스타벅스가 첫눈에 보이는 시버스 터미널로 들어가면, 지하철처럼 스크린 도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돌하르방 / 시버스 터미널


시버스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넓은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곧이어 배가 출발하고, 나는 구석에 앉아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를 찍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거의 우리 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가 봐도 이방인이었다. 배의 흔들림은 어제 탔던 스카이트레인이나 버스보다 훨씬 덜했고, 어느새 배는 남쪽으로 이동해 밴쿠버 시내에 닿았다.


밴쿠버 시내 도착


우리는 우선 카페로 향했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에 원래 가려던 카페는 못 갔지만, 대신 적당히 예쁜 다른 카페를 찾아 핫초코와 피칸, 스콘, 쿠키를 주문했다. 특히 쿠키는 혀가 아리도록 달았고, 핫초코는 예상대로 달지 않았다. 해외에서 파는 핫초코는 왜 매번 이렇게 연한 걸까. 우리는 부스러기가 아주 많았던 테이블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팁을 더해 5만 원을 지불했다.


카페를 나온 우리는 차이나타운을 간단히 둘러보기로 했다. 차이나타운까지는 금방이었다. 더군다나 바로 뒤에서 커다란 개가 시끄럽게 짖으며 따라오는 바람에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차이나타운 입구에는 커다란 기와문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이 마치 캐나다와 중국의 국경선을 보는 듯했다. 저 커다란 문을 지나면 거리에 중국풍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중국 음식을 팔고 있었다.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한 소리 같긴 하지만, 어쨌든 차이나타운은 그저 차이나타운일 뿐이었다.


차이나타운


발걸음을 틀어 BC 타운으로 가는 길에는 초등학생 때 본 애니메이션 「신기한 스쿨버스」 같은 노란 스쿨버스가 서있었다. 스쿨버스는 의도치 않게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버스의 뒤통수를 찍었다. 사실 저 스쿨버스는 우리나라의 스쿨버스와 비교했을 때 단순히 외양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캐나다의 경우 스쿨버스에 관한 안전 규제가 매우 엄격해, 스쿨버스가 한번 정차하면 모든 차가 무조건 정지해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 맞은편 차선에 있는 차량까지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캐나다를 여행하는 내내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한국과는 다르게 운전자가 보행자를 과할 정도로 기다려주고 양보해 주었다. 보행자가 미안해질 정도까지.


캐나다의 신기한 스쿨버스 © 비룡소


여름잎의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지나자 난데없이 탱크 두 대가 나타났다. 탱크는 움직이지 않고 길에 박혀있었는데, 알고 보니 캐나다 군의 역사를 기리기 위한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길을 너무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계속 띄겠다 싶었다. 우리는 이 탱크가 놓인 거리 바로 뒷블럭에서 코스트코를 발견할 수 있었다.

Beatty Street


한국에서 쓰던 코스트코 카드를 찍고 들어가자, 우리나라 가전제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마치 한국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마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 한때 좋아했던 마이스토 사의 자동차 장난감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초등학생 때 코스트코에서 아우디 자동차 장난감을 사던 오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난생처음 와보는 타지의 뜻밖의 장소에서 오래된 동심을 되찾다니.


코스트코


코스트코를 나오는 길에는 단돈 1500원으로 핫도그도 하나 사 먹었다. 콜라도 무한리필이라 한국보다도 가성비가 좋은 것 같았다. 핫도그는 물론 맛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팁을 낼 필요가 없었다. 캐나다에서 팁을 낼 필요가 없는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근처 스타디움 옆에는 시끌벅적하게 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걷는 내내 둔탁한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햇볕은 또 어찌나 센지 신호등 앞에 선 사람들 모두의 눈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하얀 암펠만이 켜지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큐브를 서툴게 쌓아놓은 것 같은 노스밴쿠버 대학이 보였다.

노스밴쿠버 대학, 도대체 어떻게 지은 걸까


그 맞은편에는 원통 모양의 밴쿠버 도서관이 자리했는데, 도서관 내부로 들어서자 밴쿠버 특유의 단정하고 쾌적한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외국에 나가 특정 나라의 도서관을 갈 때면, 그 도시만의 성격이 은은히 묻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 스웨덴에서 보았던 말뫼 도서관, 핀란드의 오디 도서관, 그리고 덴마크 왕립 도서관을 갔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라를 여행할 때 기차를 타보는 것 말고도 도서관을 굳이 들어가 보곤 한다.


밴쿠버 공립 도서관 / 스웨덴 말뫼 도서관
덴마크 왕립 도서관 / 핀란드 오디 도서관


도서관만이 자아낼 수 있는 차분한 분위기는 나에게 고요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책이 빼곡히 들어선 서가를 따라 걸으면 은은한 책 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데, 이것이 나에겐 마치 피톤치드나 다름없다. 1층 서가에는 한국 도서도 꽤 꽂혀 있었는데, 어릴 적 한창 읽었던 『메이플스토리』나 『마법천자문』 같은 만화책 시리즈도 제법 많았다. 아마 이런 책들은 캐나다에 사는 한국 아이들만 읽지 않을까. 우연찮게도 캐나다는 오늘 나의 어린 시절을 몇 번 떠오르게 한다.


입구 쪽 창가 테이블에는 엄마와 누나가 소곤거리고 있었고, 아빠는 아직 한국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까무룩 잠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창 밖을 가리켰다. 넓은 유리 너머로 중국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살랑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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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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