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여의도
오후 다섯 시가 훌쩍 넘었지만 해는 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물 한 병을 사러 마트에 들어서자 앤디 워홀이 그렸던 캠벨 수프가 진열되어 있었다. 캠벨 수프를 실제로는 처음 본 나로서는, 그림 안에 갇혀있던 수프가 입체적으로 툭 튀어나와 버린 신기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앤디 워홀이 없었다면 이 캔은 있는지도 모르게 지나쳤겠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던 앤디 워홀은 적어도 나만큼은 경계를 허무는 데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진열된 캔이 작품으로 보인다니.
우리는 캐나다의 여의도라고 볼 수 있는 그랜빌 아일랜드로 향했다. 그랜빌 아일랜드는 여의도와 같은 작은 섬이어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그랜빌 브리지로 걸어가거나 수상택시인 페리를 타고 가야 했다. 우리는 걸어가기를 택했지만, 고가도로를 걸어가는 내내 이 다리가 그랜빌 아일랜드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하곤 했다. 지도를 보면 중간에 내리는 곳이 보이질 않았다.
그랜빌 브리지에서 내려다본 펄스 강은 호주를 닮아있었다. 푸른 바다색의 강 위로 하얀 물결을 내며 흰 보트가 달려내고 있었다. 탁 트인 밴쿠버의 여름 한 장면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집에 돌아온 내가 지금의 시원함을 기억해 내도록.
우려했던 대로 우리는 그랜빌 아일랜드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지 못했다. 반대편까지 다리를 다 걸어내서야 그랜빌 아일랜드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다. 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르자 아름다운 빨간 꽃이 햇볕에 녹고 있었고, 긴 수풀머리를 치렁거리며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정원에서 발걸음을 겨우 돌리고는, 작년에 덴마크에서 본 것 같았던 실내 마켓에 들어가보았다.
마켓 안에는 신선한 과일과 연어를 비롯한 해산물, 높게 쌓아놓은 베이글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과일의 향기는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는 건지, 마켓에 들릴 때면 항상 납작 복숭아를 사게 된다. 복작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마켓 밖으로 나가면, 부두가 바로 보이는 야외 공간이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강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을 바라보면 왜 걱정이 없어지는 걸까. 조금 뒤 엄마는 귀엽게 젤라또 하나를 깨물며 왔고, 우리는 4인석 야외 테이블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머리 위로 푸른 굉음이 지나갔다. 전투기 여러 대가 구름을 뿜어내며 편대 비행을 하고 있었다. 부두에 있던 많은 사람들 모두가 놀란 듯이 하늘을 쳐다봤다. 아빠는 카메라를 들어 동영상을 찍고는 나에게 신나게 자랑을 했다. 전투기는 우리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 저 멀리 빌딩 뒤까지 빠르게 날아갔다.
‘쿠구구궁—’ 소리가 또다시 들리자, 아빠는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하늘을 향해 팔을 올려 들었다. 그러자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캐리어 끄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도 할 겸, 마켓을 나와 그랜빌 아일랜드 브루잉(Granville Island Brewing)이라는 맥주집으로 갔다. 이 가게에서는 네 종류의 맥주를 작은 양으로 마셔볼 수 있었다. 라즈베리, 아이스 라거 등 서로 다른 네 모금의 맥주 맛은 향만 조금 다를 뿐 맛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캐나다 요리라며 푸틴도 시켰는데, 내가 보기에 그냥 감자튀김에 양념소스와 치즈 조각을 곁들인 특색 없는 요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웬일로 우리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직도 해가 밝게 떠있는 오후 8시, 장을 보러 월마트로 가는 도중 엄마와 나는 갑자기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그 모습이 귀엽다며 뒤에서 사진을 남겼다. 우리는 월마트 앞 횡단보도까지 뜀박질을 했다. 캐나다의 신호등은 하얀불이었고, 기둥에 붙어있는 버튼을 눌러야 신호가 바뀔 준비를 시작했다.
파란 간판의 월마트는 생각보다 아주 넓었다. 숙소에서 밥을 지을 수 없었던 우리는 전기밥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할인해서 만 구천 원정도 하는, 꽤 괜찮은 퀄리티의 밥솥을 하나 장바구니에 넣었다. 냉동 코너에는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캐나다에서만 구할 수 있는 ‘Oh Cone-ada!’ 맛의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밤 10시 반, 잉글리시 베이에서 하고 있던 불꽃축제의 알록달록한 불꽃이 검은 나무 사이로 보인다. 아빠와 나는 숙소 앞 공원을 가보기로 했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입구가 너무 어두웠던 탓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글 같은 야생의 트레일이었기에 정말 곰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집에 들어와 일기나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 자기 전 쓰는 일기가 오늘 특히 길어졌는데, 그만큼 오늘 하루가 매우 알찼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