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를

대여료 별도

by 찬희


고슬고슬한 밥 냄새가 나를 깨운다. 어제 산 전기밥솥으로 아빠가 밥을 지어놓은 것이었다. 엄마는 인스턴트 미역국 블록에 더운 물을 부어 미역국을 우려내고 있었다.


어느덧 친숙해진 식탁에서 아침을 챙겨 먹고는, 산책을 하러 집을 나온다. 숙소가 위치한 마을엔 인적이 드물었다. 맞은편 집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공원이 하나 나왔는데, 입구에는 두 개의 갈림길이 있었다.


‘쿠거 조심’


주의를 알리는 문구가 꽤나 생경하다. 내가 그간 보았던 주의 문구는 기껏해야 '개조심'이 다였는데 말이다. '쿠거'라니. 머릿속으로 산책을 하다 쿠거에 물리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다른 갈림길을 바라본다.


'사나운 새 조심'


이건 또 뭘까. 한국 공원에는 기껏해야 비둘기나 까치들이 앉아있는데, 캐나다의 공원에는 어떤 새들이 있기에 새를 보고 주의 문구를 걸었을까. 그래도 쿠거보다는 새가 낫겠다 싶어 발걸음을 네다섯 발자국 정도 옮겨 걸어 들어가다가 결국 걸음을 되돌렸다. 너무 날 것의 길이었다.


작은 잔디밭을 걸어 나오면 어제 못 보고 지나쳤던 하얀 표지판이 보였다. ‘BLOCK WATCH AREA’, ‘모든 의심스러운 행동들은 경찰에게 보고됩니다.’ 나는 이 표지판을 본 뒤로 마을 주민들을 마주칠 때마다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띄엄띄엄 놓인 무심한 집들이 사실 서로를 지켜주고 있었다니.


무심한 것 같아도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집 앞 작은 마을은 항상 적막하다. 미국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주택들을 지나면, 정거장 주위엔 초록빛의 풀밭 위로 민들레가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번져 있었다. 우리는 정거장 의자에 나란히 앉아 240번 버스를 기다렸다. 팔을 높이 올려 가족사진을 한 장 찍고 나면, 저 멀리서 240번 버스가 천천히 미끄러 들어왔다. 캐나다의 버스는 차체가 아주 낮았는데, 아마도 장애인과 노약자를 배려하기 위해서일테다.


버스는 첫날 탔던 사나운 버스보다 훨씬 부드럽게 달렸다. 창문 밖으로 푸른 바다가 다 지나가고 숲이 조금씩 우거질 때 즈음, 우리는 하차벨을 눌러 버스의 정적을 깨뜨리고는 스탠리 파크에 발을 내렸다. 먼저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신다는 ‘조이 바이크’에 들렀다. 탁한 목소리의 한국인 여직원은 우리를 모국어로 친절하게 맞이했다. 우리는 총 세 대의 자전거를 대여했다. 엄마와 아빠가 탈 커플 자전거 하나, 나머지 싱글 자전거 둘. 나는 자전거의 머리를 빙글 돌려 스탠리 파크 입구까지 끌고 갔다. 바닥에 자전거 도로 표지가 나타나자 라임색 헬멧을 쓴 엄마와 아빠는 나란히 안장에 올라탔다. 누나는 나의 뒷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나는 빨간색 헬멧을 쓰고는 자전거의 페달을 신나게 밟기 시작했다.


하얀 보트가 빼곡한 작은 항구를 지나자,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 위로 수상기가 둥실대고 있었다. 수상기는 곧이어 프로펠러를 돌려 물 위를 유유히 달리다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자전거를 멈춰 세운 나는, 한참을 그 수상기를 따라 시선을 쫓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바닷길을 따라 달린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곧이어 거대한 유람선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와, 스탠리 파크에서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란. 그때, 누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알고 보니 여기는 스탠리 파크가 아니었다. 스탠리 파크 반대쪽인지도 모르고 신나게 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진짜 스탠리파크 입구에서 네 명이 다시 모이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여기는 스탠리 파크가 아니었습니다


스탠리 파크 초입에서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짙은 고동색의 말 한 마리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또각거리며 사람들을 한가득 태운 마차를 끌고 있었다. 내 앞에 있던 여자는 마차를 찍다가 자전거를 미끄러뜨리기도 했다.

또각또각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따라 자전거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길을 달려낼 수 있고, 도보보다는 많은 것들을 단기간에 볼 수 있다. 물론 여름엔 조금 더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날 유달리 강했던 뙤약볕에도 나무는 금방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었다.


나는 터키옥색의 높다란 철교 밑을 지나 흰모래가 깔린 작은 해변에 다다랐다. 몇몇 사람들이 냅다 모래 위에 몸을 뉘고 있었다. 나는 그늘이 드리운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백사장에 누운 사람들처럼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름 바다는 파도의 얼굴로 잔잔히 부서지며 들어왔고, 낮의 대기는 바람의 형태로 살랑였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머릿속 많은 사념들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1시 반까지 자전거를 반납해야 했기에 계속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다시 안장에 올라타 '조이 바이크'로 향했다. 길을 찾기가 까다로웠던 탓에 종종 자전거를 세워 지도를 계속 확인해야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시간 내에 자전거를 모두 반납할 수 있었다.


스탠리 파크의 그늘과 해변


허기를 못 참고 케밥 가게에서 케밥 하나를 샀다. 케밥은 베를린에서 먹었던 것보다 양이 더 많았다. 주인과 직원은 친절해 보였지만, 실수였는지는 몰라도 두 배의 가격을 받아냈다. 나는 현금으로 환불을 받아내고 길거리에서 혼자 케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외국인 여자는 내 케밥을 가리키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맛있어 보였나. 그때 엄마는 바로 뒤 피자 가게에서 하와이안 피자를 사고 있었고, 아빠와 누나는 팀 홀튼에서 커피와 도넛을 사고 있었다.


피자박스를 들고 도착한 ‘잉글리시 베이’라는 해변에는 벤치가 아주 많았다. 물론 벤치만큼이나 사람도 많았던 탓에, 누나가 어렵사리 비어있는 벤치로 뛰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나무 벤치 위에 피자 한 판을 올려놓고는 커피와 도넛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나는 마지막 피자 조각을 물고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파도가 가까이 보이는 앞쪽 벤치에 앉자, 옆자리의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해변의 풍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여행을 다니며 저런 그림을 그려내고 싶지만, 눈으로 본 풍경을 곧잘 그려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안다. 사실 잉글리시 베이의 풍경에 특별할 만한 것은 거위였다. 푸른 잔디 위에나, 하얀 모래 위에나 커다란 덩치의 거위로 북적였다.


English Bay


오후의 해변을 뒤로하고, 나는 가로수길을 따라 가스타운으로 향했다. 여름색의 가로수길은 선연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가끔 보이는 적갈빛의 나뭇잎이 캐나다스럽게 단풍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가스타운보다 걸어가는 길이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Haro Street


가스타운에 도착하자 거리의 악사는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적자주색의 고풍스러운 건물 앞 가로등에는 예쁜 화병이 걸리어 있다. 화병에 시선을 옮기자 검은 표지판이 눈이 들어왔다. 일방통행이라는 뜻의 'ONE WAY' 표지판은 항상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만의 길을 가라, 뭐 이런 의미를 던져주는 느낌을 받는달까.

가스타운

여름 햇살에 연두빛으로 반짝이는 나무를 따라 걸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이라도 본 듯 증기시계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머지않아 증기시계는 뿌연 증기를 뿜어내며 빅벤 시계탑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연주했다. 증기가 피스톤을 밀어 올려 종을 다 울려내자, 사람들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스타운 증기시계


저녁 7시, 나는 오늘 아침 무서워서 못 갔던 집 앞 공원을 아빠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날이 아직 밝았기에 둘이라면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입구부터 너무 정글이었다. 마치 시간을 역행해 중생대에 온 것 같았다. 곰이나 쿠거가 나타날까 봐 걱정하며 걸어 들어갔지만, 사실 이 정도면 공룡이 걸어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정글을 걷는 내내 사람 한 명 발견하지 못했다. 왜 아무도 없는 걸까. 인적이 드문 마을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혼 공원 트레일

미지의 세계에서 사람의 부재는 고립의 두려움을 서서히 굴려온다. 우리는 출구를 발견하고 나서야 사람을 처음 볼 수 있었는데, 우리 말고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안도감을 주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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