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체르마트
이른 아침부터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려는 것이 아니라 렌터카를 빌리기 위함이었는데, 내일 밴쿠버를 떠나 베일마운트로 가려면 차가 필요했다. 내일 아침 밴쿠버를 떠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렌터카를 타고 로키 산맥을 따라 이곳저곳 여행을 해볼 셈이었다.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워터프론트역에 들어서자, 불현듯 "아 맞다, 지갑!" 하고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갑을 숙소에 놓고 오는 바람에 나는 종이티켓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전리품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다. 티켓에는 나침반을 뜻하는 단어인 Compass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행 다이어리에 이 트레인 티켓을 신나게 붙일 테다.
승강장으로 내려가자 스카이트레인의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스카이트레인에 잽싸게 올라탔다. 그때, 뒤따라오던 아빠와 누나가 채 타기도 전에 열차 문이 닫히고 말았다. 우리는 잠시나마 이산가족이 되어 공항까지 향했고, 물론 얼마 안 가 밴쿠버 공항역에서 상봉을 해냈다.
공항에는 다양한 렌터카 업체가 있었지만, 우리가 예약한 곳은 '알라모'라는 업체였다. 렌터카를 빌리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 네 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보험옵션이니 보증금이니 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더군다나 우리가 여행할 재스퍼와 밴프는 특히 GPS도 잘 터지지 않는 곳이라, 내비게이션용 GPS를 따로 받아야 했다.
직원은 검회색 토요타를 보여주며 간단한 안내를 시작했다. 자동차의 첫인상은 트렁크가 아주 커다랗다는 것이었는데, 괜히 작은 캐리어를 가져왔나 싶었다. 여기 누워도 되겠는걸. 아까 받은 GPS를 앞유리에 눌러 붙이고, 내비게이션 단자를 찾아내 연결을 했다.(사실 베일마운트부터 길이 한 갈래라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었다.)
렌터카도 빌린 김에 우리는 그간 못했던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우리는 시투스카이 하이웨이(Sea-to-Sky Highway)를 따라 달렸는데, 이 도로는 단순한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브랜디와인 폭포, 시투스카이 곤돌라 등 캐나다 해안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스팟들이 도로가 곳곳에 계속 나타났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창 밖의 초록빛 바다와 울창한 침엽수림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일제히 입을 벌리며 창문에 비친 풍경을 찍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동차는 이동수단을 넘어 하나의 장소로 변모했다.
우리는 해안가를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를 계속 달려 휘슬러에 도착했다. 휘슬러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마을인데, 내가 보기에 전혀 올림픽스럽지 않았다. 높다란 나무들과 고즈넉한 목조건물들을 보면 오히려 스위스 체르마트와 닮아있었다. 체르마트보다는 그 규모가 작았지만, 나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마을 입구에 걸린 고혹적인 꽃바구니는 나를 멈춰 세웠다. 아름다운 꽃더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안 찍고 배기겠어?
나는 이끌리듯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화병은 도화살이 가득했다.
겨우 화병을 지나친 나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안쪽엔 스키샵과 자전거 렌탈샵이 늘어서 있었다. 스키플레이트와 부츠들이 빼곡했고, 자전거 용품도 매한가지였다. 휘슬러는 누가 봐도 여름엔 자전거를, 겨울엔 스키를 타러 오는 곳이었다.
광장에 들어서자 뜬금없이 베트남풍의 웰컴 피규어가 서있었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과는 관련이 없었다. 동상의 옷차림은 캐나다 원주민의 전통의상이었고, 예로부터 이 지역 원주민들은 아래와 같이 손바닥을 보이며 다른 이를 맞이했다고 한다.
우리는 석상 근처에 위치한 파란 간판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실 가격은 꽤 비쌌지만 어찌 됐든 점심을 해결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우리 네 명은 잠시 고민에 잠겼지만 가족회의 끝에 메뉴 세 가지를 주문했다. 아보카도 토스트, 과카몰리를 추가한 샐러드볼, 수제버거세트 하나. 끼니를 때우기엔 양이 적다고도 생각될 수 있겠지만, 치킨 한 마리를 네 명이서 나눠먹는 우리 가족의 배를 불리기엔 충분했다.
오후 6시, 밴쿠버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누나와 가스타운에서 쇼핑을 했는데, 이때 돌아오는 길에 먹었던 딸기바나나 스무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시버스 터미널 안에 있는 작은 카페였는데, 구글 맵 평점과 다르게 아주 맛있었다. 역시 리뷰는 100% 믿을게 못 된다, 이 집 스무디는 내가 먹어본 과일 스무디 중에 최고였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과일을 깎고 있었다. 방금 생과일주스를 먹고 돌아온 우리에게 엄마는 또 애플망고를 건넸다. 그래도 애플망고는 참을 수 없었다. 달콤한 과육을 깨물어 씹다 보면 떫은 뒷맛이 입안에 맴도는데, 이 오묘한 뒷맛이 너무나도 중독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애플망고를 끝으로 냉장고를 모두 비워냈다.
이제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정들었던 밴쿠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