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여전하다
2024년 7월에 발생한 재스퍼의 산불은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큰 규모의 산불이었다. 화재는 급속하게 번져 32,000 헥타르 이상의 대지를 불태웠고, 엄청난 재정적 손실과 환경적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화마가 재스퍼를 삼켜버린 지도 어언 1년이 넘었지만, 재스퍼는 여전히 화재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새벽 공기에 차가워진 차 시트에 몸을 기대어 재스퍼의 풍경을 바라본다. 아까 재스퍼 입구에서 팜플렛을 나눠주며 미소를 건네던 톨게이트 직원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재스퍼의 첫인상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작년 산불로 홀라당 타버린 나무들이 철근처럼 앙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임시 거처로 마련된 컨테이너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위성 안테나가 달린 컨테이너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올봄을 휩쓸었던 대형 산불이 떠올랐다. 외할머니 댁이 안동이었기에, 몇 달 전 경북 산불이 남긴 슬픈 흔적을 목도할 수 있었던 나였다.
경북 산불과 차이점이 있다면, 재스퍼의 경우 그 누구도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방화를 한 것이 아니라 낙뢰에 의한 자연적인 발화였다. 캐나다의 산불은 자연의 순리에 가까웠다. 인간 중심에서야 모든 산불이 다 재난이겠지만, 자연 입장에서 어떤 산불은 필수적인 재생과정일지도 모른다.
눈앞에 철근숲을 목격하니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은 모든 것을 굴복하게 만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받아들이는 것 외엔 없다. 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한 것만큼 무서운 게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재스퍼의 피라미드 호수에 차를 세웠다. 차문을 열고 나오면, 아침의 대기는 초겨울처럼 차가웠다. 계절에 여름이라는 이름을 달면서 겨울의 공기를 내어주다니. 염치없는 재스퍼의 추위에 나는 몸을 한껏 웅크려야 했다.
태초적인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호수는 유리처럼 투명한 물결을 보여냈다. 호수 건너편에 숲이 울창한 것으로 보아, 피라미드 호수는 산불을 간신히 피해낸 것 같았다. 덕분에 호수는 숲을 비추어 초록빛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하나의 아름다운 거울을 보는 듯했다. 다시 말해 호숫가 발치는 유리처럼 투명했고, 먼발치의 호숫가는 거울처럼 숲을 투영했다. 시선을 옮겨 호수 기슭에 늘어선 나무들을 들여다보면, 침엽이 나무줄기의 나선을 따라 하늘로 솟아있었다.
오전 11시, 아침을 굶은 우리는 재스퍼 시내로 들어가 Mad Grizzly Bistro라는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대신 요리의 퀄리티가 높았다. 나는 삼겹살을 구운 밥과 곁들여 먹었는데, 한식당이 아니었음에도 잘 구워낸 돼지고기가 위장을 든든하게 채워냈다.
식사를 마친 나는 근처 기념품샵을 한번 훑었는데, 맨들맨들한 돌멩이를 돈을 받고 팔고 있었다. 이걸 누가 사냐 싶기도 하겠지만, 형형색색의 예쁜 돌멩이들을 실제로 보면 살 법도 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다음 여정지는 멀린 캐년이었지만, 산불로 인해 폐쇄된 탓에 우리는 메디신 호수로 방향을 틀었다. 과거 북미에 살던 원주민들은 이 호수를 보고 신비한 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메디신 호수'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아래에 보다시피 호수의 물빛만 봐도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겨울이 되면 메디신 호는 바닥을 드러내지만, 지금과 같은 여름에는 기꺼이 신비한 정경을 보여준다.
호수는 은빛 거울을 닮아 있었다. 호숫가 둘레를 따라 걸으면 연두색 풀밭 위로 화가가 칠해놓은 붓자국처럼 노란 꽃잎이 곳곳이 피어나 있었다. 나는 아이처럼 푸른 풀밭을 자유롭게 뛰다녔다. 일상도 던져버리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감각은 나를 살아있게 했다. 엄마는 길가에 쪼그려 앉아 송송이 피어난 조그마한 들꽃을 찍고 있었다. 엄마가 나이가 들어서 꽃이 예뻐 보이는 게 아니었다. 들꽃은 정말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나는 그림 같은 데이지 꽃이 한가득 피어난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호수 너머엔 원래 푸르른 숲이 울창해야 했지만, 산불은 우거진 숲을 따가운 바늘처럼 바꿔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스퍼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제아무리 산불이 재스퍼의 나무들을 집어삼켜도 아름다움은 태워내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