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섬에 다다르다
멀린 호수(Maligne Lake)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빙하호로, 그 길이만 22km에 달한다. 따라서 이렇게 긴 호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크루즈를 따로 예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티켓을 날리지 않으려면 오후 3시까지는 선착장에 도착해야 했다.
서둘러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 모조리 타버린 숲이 한가득 드러났다. 저 삭막함이 푸르름을 되찾기까지는 과연 얼마의 시간을 필요로 할까.
멀린 호수 선착장에 도착하자 정박된 하늘색의 보트 위로 캐나다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크루즈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멀린 호수 크루즈는 생각보다 작았다. 차라리 멀린 호수 ‘보트’라고 이름 짓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보트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탔는데도 40명이 채 안되었다. 수면을 따라 배는 서서히 출발했고, 둥근 모서리의 창문 밖으로는 호수가 일렁였다. 마이크를 단 크루즈 가이드가 뱃머리에 서서 설명을 시작하자, 아빠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AI로 실시간 번역을 돌리고 있었다.
창 밖엔 어느새 비가 추적였다. 빗방울은 호수 위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고, 앞 유리에는 나뭇가지 같은 와이퍼가 빗자국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선장은 카약이 보이면 배의 속도를 늦췄다. 배의 물결이 자칫 작은 카약을 다 뒤집어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는 항상 카약 옆을 다 지나가서야 하얀 물거품을 내뿜으며 속도를 높였다. 덕분에 카약은 잔잔하게 떠다닐 수 있었지만, 어쩌면 너무 잔잔한 나머지 이같이 사려 깊은 배려를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다란 멀린 호수의 중앙에는 '스피릿 아일랜드'라는 섬이 위치해 있었는데, 누군가는 이를 호수의 심장이라 불렀다. 한참을 달려낸 하늘색 보트가 스피릿 아일랜드에 닿자, 크루즈 가이드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이라는 소식을 알렸다. 15분이라니,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호수의 심장'이라는 이름답게 섬 주위로 호수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다. 추적이는 빗방울은 수정 같은 멀린 호를 반짝이게 했고, 스피릿 아일랜드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생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섬에서 바라본 멀린 호의 풍경을 어떻게 더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스위스와는 확연히 다른 태초적인 느낌이 있었다.
15분을 조금 넘겨 직원들은 승객들을 허겁지겁 배에 태웠다.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배 안에 앉아 있지 않고 뒤편 갑판에 나와있었는데, 유리창을 거치지 않은 호수의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배가 뿜어내는 하얀 포말이 청록빛의 호수로 녹아들어가고 있었고, 배의 뒤편은 하얀 부채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서는 뾰족한 침엽수림이 빼곡하게 하늘을 찔렀고, 거울 같은 호수 표면 위에는 윤슬이 반짝였다.
선착장으로 돌아오자 두 시간이 지나있었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캘거리로 향했다. 이곳은 우리가 앞으로 7박 8일간 묵을 곳이었다. 밴프 국립공원을 주로 여행할 예정이지만, 숙소가 다소 비싼 탓에 캘거리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캘거리까지는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그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먼저, 도로를 달리던 도중 곰을 만났다. 물론 집채만 한 곰은 아니었지만, 도로가 수풀에서 나온 새끼곰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곰 한 마리는 도로가를 달리던 모든 차를 멈춰 세웠다. 차창 밖으로 다들 머리를 빼꼼히 내놓고는 숨죽인 듯이 속삭이는 모습이 새끼곰만큼이나 귀여웠다. 캐나다 사람들도 곰이 신기한가 보다.
또한, 아이스필드 파크웨이(Icefield Parkway)를 달리던 도중 '스노 돔(Snow Dome)'이라는 멋진 설산을 마주했다. 흐린 날씨는 오히려 풍경에 신비함을 더했는데,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왔던 얼음 행성을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란 빙하는 골짜기 사이로 얼음빛의 혀를 내밀고 있었고, 산봉우리는 자욱한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저녁 즈음 바우 호수(Bow Lake)를 잠시 들렀을 때도, 운 좋게 날씨가 맑게 갠 덕에 호수의 푸른 물빛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터키석 빛깔의 거울 같았지만, 호숫가로 내려가 물에 손을 담가봤을 때는 차갑게 녹은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투명했다.
날이 차츰 어둑해지고, 아빠는 주행거리 1700km 돌파를 알렸다. 캘거리에 거의 다 와갈 무렵, 컨테이너를 이층으로 쌓은 기차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기차는 끝도 없이 길었는데, 마치 무한히 움직이는 벽을 보는 듯했다. 우리는 덕분에 10분이 넘는 시간을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만 사용했다.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만 할 수 있는 일종의 플렉스가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저렇게 긴 기차가 다니면 서울역 꼬리칸에서 탄 승객이 기차 내부로 걸어가 영등포역 머리칸에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오후 11시, 밤늦은 시각이 다 되어서야 캘거리에 도착했다. 숙소가 위치한 마을엔 적막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있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우리 숙소는 입구를 찾기가 어려워 한참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시끄러운 캐리어 바퀴소리가 마을의 정적을 마구 깨뜨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러그 재질의 계단이 아래로 나있었고, 1층의 주인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여기는 반지하도 아닌 생지하였다. 나는 실망한 얼굴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지만, 생각지도 못한 넓은 저택의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는 부잣집이 분명했다.
지하여도 이 정도면 기꺼이 기생충이 될만하다. 7박 8일간 행복한 기생라이프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