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프 곤돌라

제가 이걸 누려도 될까요?

by 찬희

아침에 눈을 뜬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여행을 간 것 치고는 너무 늦은 기상이지만, 어제까지 일정이 빡빡했던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캘거리에서 처음 마주했던 늦은 아침에 대해 말하자면, 낮은 인구밀도가 주는 평화로운 여백이 있었다. 도로가의 소음이나 시끄러운 대화소리보다는 풀벌레 소리나 내 발자국 소리가 훨씬 크게 들렸고, 한적한 마을은 별 걱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캘거리의 아침

캐나다 알버타 주에 위치한 밴프(Banff)까지는 1시간 30분을 달려야 했다. 밴프에 숙소를 잡았더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겠지만, 그 시간을 고려해도 캘거리에 비해 숙박비가 아주 비쌌다. 때문에 우리는 매일 아침 출근하듯이 밴프로 향했다. 오늘의 출근지는 설퍼산(Sulphur Mountain)을 볼 수 있는 '밴프 곤돌라'였는데,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곤돌라 대기줄에는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는 QR코드가 붙어있었다. 탑승장이 위치한 곳은 데이터도 잘 안 터지는 산지라, 지루한 대기시간을 견뎌내려면 와이파이 연결은 필수였다. 어느덧 우리 차례가 찾아오고 초록색의 원형 레일을 따라 4인승 곤돌라가 돌아 들어왔다. 우리는 문이 닫혀버리기 전에 서둘러 몸을 실었다. 가족 네 명을 모두 태워낸 곤돌라는 천천히 문을 닫더니 생각보다 성급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곤돌라가 앞뒤로 세게 흔들리자, 겁이 많은 엄마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구석의 바를 잡았다.

설퍼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창문 옆을 돌아보니 밴프의 여름이 산등성이를 따라 푸르게 돋아나 있었다. 빼어난 풍경 탓에 겁에 질린 엄마도 뚫린 창 밖을 힐끗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때 아빠는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블카를 앞뒤로 흔들었다. 아빠의 장난에 엄마는 질색을 했고, 아빠는 다시 엄마를 달래기 위해 어깨를 꼭 잡아줬다.


정상에는 두 개의 큰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하나는 뷔페(Northern Lights Alpine Kitchen)였고, 나머지 하나는 비스트로 레스토랑(Sky Bistro)이었다. 우리는 고심하다 뷔페를 가기로 결정했다.

Northern Lights Alpine Kitchen, 뷰 맛집이다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서자 원형의 창가를 따라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테이블 당 한 명의 웨이터가 배정되었는데, 우리 테이블에는 금발의 웨이터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하얀 접시에 레몬을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와 피자 한 조각, 그리고 돼지고기 스테이크 한 덩이를 담았다.

츄파춥스가 킥이었다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부드러운 연어 스테이크를 먹으며 바라본 유리 밖 풍경은 최고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캐나다 국기 뒤로 아름다운 산골짜기를 따라 에메랄드빛 강이 굽이치고 있었다. 뷰 값을 포함한다면 45,000원은 가성비가 좋은 편이었다. 스위스에서 먹었던 김치찌개가 42,000원이었는데 말이다. 대신 여기는 팁이 있다. 아까 아빠가 콜라를 냅다 바닥에 쏟아버려서 우리는 담당 웨이터에게 팁을 두둑이 챙겨주었다.

식당 뷰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전망대로 향하는 짧은 길을 걸었다. 나무 펜스 너머로 보이는 빼곡하게 우거진 푸른 숲은, 영화 「아바타」에서나 볼 수 있는 컴퓨터그래픽을 보는 듯했다. 비현실적인 풍경에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사진을 찍어도 풍경이 잘 담기지 않았다. 어떤 카메라도 이 산맥의 공간감을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설퍼산의 정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밴프 다운타운을 잠시 구경했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예쁜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조금 길다. 캐스케이드 오브 타임 가든(Cascade of Time Garden), 이하 '타임 가든'.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행정 관리소 건물치고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값비싼 호텔인 줄만 알았는데.

캐스케이드 오브 타임 가든

타임 가든의 조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신비한 색감의 보라색 꽃들이 연두빛 수풀 위로 고개를 내밀었고, 뒤편의 높다란 나무들은 로키산맥을 배경으로 우뚝 자라 있었다. 정원 한복판에는 시간이 흐르듯 작은 물길이 나있었는데, 물길 너머로 시선을 옮기면 『해리포터』 속 해그리드가 살 것 같은 오두막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확실히 판타지 영화 세트장으로 써도 될 정도로 영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해그리드가 살고 있을 것 같다

한편, 바우 강(Bow River) 건너 밴프 에비뉴(Banff Avenue) 거리에는 쇼핑몰과 기념품샵이 마구 늘어서 있었다. 사실 이 거리도 예쁘기로 유명하지만, 정신없이 쇼핑을 하느라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파타고니아 매장 근처에서 한글로 새겨진 비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검색해 보니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밴프 에비뉴에 위치한 한국전 가평전투 메모리얼

위에 보이는 비석은 한국전쟁 당시 가평전투에서 활약했던 캐나다 군을 기리기 위한 메모리얼이다. 나는 비석을 본 순간 밴쿠버에서 봤던 돌하르방도 떠올랐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두 나라가, 역사와 문화의 인연으로 이렇게 뜻밖의 지점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나와의 연결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여행은 일종의 네트워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 풍경, 기억 등 이곳저곳을 연결해 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단단히 엮어진 나만의 연결망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다. 사실 삶이라는 게 결국 연결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도 조금 더 나다워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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