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크 루이스

비 오는 호수의 풍경

by 찬희
레이크 루이스의 김연아 © YUNA STORY

레이크 루이스는 김연아 선수가 피겨스케이트를 탔던 곳으로 화제가 되었던 밴프의 호수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꽁꽁 얼어붙은 레이크 루이스에서 저렇게 스케이트를 타보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지금은 여름이 아닌가. 여름의 레이크 루이스는 물이 다 녹아 있어 호수 한복판까지 가려면 값비싼 카약을 타는 방법이 유일할 것이다.


레이크 루이스를 가려면 미리 셔틀버스를 예약해둬야 했다. 환경보호를 위해 호숫가에 일반 차량의 주차를 금지시켜 놓았는데, 사전에 온라인으로 셔틀버스를 예약하지 못했다면 레이크 루이스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아침 8시 버스를 예약해 둔 탓에, 꼭두새벽부터 차를 이끌고 셔틀을 타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파크 앤 라이드(Park and Ride)' 표지가 세워진 주차장이 보인다. 형광조끼를 입은 직원들이 수신호를 건네며 차량들을 통제하고 있다.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차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주차할 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셔틀버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에 맞춰 배낭에 넣어놓은 김밥통이 자꾸 툭툭 허리를 찔러댔다.


허리를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타자,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예약이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버스는 예정 시간대로 정각에 출발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시간보다도 버스에 사람이 어느 정도 찼는지에 따라 출발을 결정한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버스에서 약 40여분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 앉은 엄마는 시간이 아까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셔틀 안에서

목적지인 레이크 루이스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생각보다 짧은 거리에 셔틀에 대한 회의감도 조금 느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루이스 호수가 바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짧은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호수의 물빛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직 겨울을 품고 있는 설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활한 호수는, 구름진 하늘보다 훨씬 하늘빛에 가까운 색깔을 담아내고 있었다. 호숫가를 따라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발을 디딜 틈이 없었고, 잔물결이 살짝 이는 탁한 유리빛의 호수 위로는 새빨간 카약이 꽃잎처럼 떠다녔다.

레이크 루이스

기온은 아주 낮았다. 이렇게까지 추울 줄 몰랐는데 말이다. 우리는 초겨울 날씨 속에 오솔길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흙바닥을 따라 걸어보면 키 큰 침엽수들이 촘촘하게 하늘을 찌른다.

트레킹 초반만 해도 이렇게 호수가 보였는데 말이다

트레킹 초입에는 저렇게 나무 사이로 레이크 루이스가 고개를 내밀곤 했는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호수는 자취를 감췄다. 의외로 트레킹 코스에서 호수를 보기란 어려웠다. 산길을 따라가면 호수를 계속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르막길을 따라 도착한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미러 레이크. 비교적 작은 규모의 호수였지만 레이크 루이스와는 다른 청록색의 물빛을 담고 있었다. '미러 레이크'라는 이름은 청록빛 거울을 본따서 이름 지은 거겠지만, 나는 거울보다는 눈동자가 떠올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묘사한 것처럼 '대지의 눈'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미러 레이크

사실 식사를 할 곳이 없었기에, 우리는 호숫가 벤치에서 간단히 김밥으로 요기를 했다. 어글리 코리안이 되지 않도록 뒷정리도 꼼꼼하게 했다. 정리를 하던 중에는 다람쥐 한 마리가 쏜살 같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정말 귀여워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엷은 갈색의 볼캡을 눌러쓰고는 다람쥐를 계속 따라다녔다.


다음 목적지는 아그네스 호였다. 가는 도중엔 이유 모를 굵직한 말똥이 길바닥에 퍼질러 있었다. 웬 똥이 이렇게 많나. 똥을 피해 걸어 다니느라 앞을 주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 똥의 정체를 알리는 근육질의 말들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선 험준한 산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말이 다니기엔 산길이 험했는데, 괜히 말이 불쌍했다.


산 중턱에는 마구간도 있었는데, 그중에는 말 한 마리가 사육사의 손길을 뿌리치며 삐진 듯 고개를 팽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 산속에 엉뚱하게 말이 많은 것은 단순히 인간 탓이겠지? 평야를 달리고 있어야 할 말이 산에 있다니, 본능을 억압하는 행위가 아닌가.

산 중턱의 마구간이라니

아그네스 호에 도착하자, 하늘은 더 흐려져 있었다. 흐린 날씨 탓에 아그네스 호는 실력 발휘를 못하듯 탁한 물빛을 보여냈다. 조금만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았다. 자칭 날씨요정이라던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그네스 호

아그네스 호에서 레이크 루이스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우리는 레이크 루이스까지 길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아그네스 호가 높은 고도에 위치했기에 우선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나는 심상치 않은 광경에 겁을 조금 먹었는데, 비탈진 길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쏟아져 내린 듯 경사면 하나를 다 뒤덮고 있었다.

낙석 주의

돌이 금방이라도 굴러 내려올 것 같아서 괜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따라 고도가 차츰 낮아지자, 우리는 레이크 루이스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레이크 루이스의 정경은 드넓었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비는 호수에 특별한 분위기를 더했다. 몽환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되나.

비 오는 레이크 루이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뭐, 덕분에 산길이 꽤나 한적하긴 했지만 신발에 물이 들어가 젖은 양말이 찝찝함을 계속 더했다. 하필이면 모래색의 바지를 입은 탓에 내 바지는 보기 좋게 진한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다. 또, 트레킹화가 따로 없어 러닝화를 신은 나는 툭하면 빗길에 미끄러졌고, 펜스도 없었던 길에 조금 위험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호숫가에 다다르자 꽤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가 아주 많았어서 한 10분 동안은 점프를 계속해야 했다. 덕분에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어 얼룩덜룩했다. 이 상태로 차에 탄다면 청소하기도 힘들 텐데.


깎아지른 절벽을 지나자 발바닥과 다리가 서서히 아파왔지만, 저 멀리 페어몬트 호텔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트레킹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원래 페어몬트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를 마셔볼까 했었지만, 우리는 애프터눈 티 일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물론 아치형 유리창 밖으로 비 오는 호수의 풍경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비에 젖은 찝찝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페어몬트 호텔

캘거리의 밤, 잠들기 전에 아까 봤던 레이크 루이스를 펜으로 그려봤다. 처음에는 풍경을 자세히 보면서 그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귀찮아져서 대충 뭉그러뜨리는 바람에 나무 아래쪽이 확 어그러졌다. 늘 여행 스케치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미대생처럼 그림을 뚝딱 그려내는 사람들을 보면 한껏 부러움이 차오른다. 유튜버 이연님이 잘 그리는 방법은 결국 잘 보는 거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글 쓰는 일도 매한가지 아닐까 싶다. 잘 관찰해 내는 사람이 결국 글로 잘 묘사하는 것처럼.

여행 스케치 하나, 레이크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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