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러너다. 러닝화를 챙겨 온 것도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는 습관 때문이었는데, 그동안 달릴 시간과 장소가 마땅치 않아 달리지를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 핑계가 들어간 말이지만.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캘거리에서만 하루를 다 보내기로 한 날, 아침에 잠깐 시간이 비었다. 신발을 챙겨 신고 마을로 걸어 나오자 캘거리의 아침은 텅 비어있었다. 아침의 분주함이란 무엇이었던가.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마을을 달리기 시작하자 멈춰있던 바람이 조금씩 살랑인다.
뜀박질하는 발소리가 마을의 정적을 깨뜨린다. 하나둘, 발걸음에 맞춰 숨소리가 차오르면 호흡은 머릿속을 텅 비워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던 '아담한 공백' 속을 달린다는 것이 이런 걸까.
더군다나 여행지에서의 러닝은 무언가 특별하다. 낯선 거리를 따라 달리면 모든 것이 새롭다. 맞은편에 달려오는 현지의 러너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까지. 때 묵은 일상의 걱정들이 마구 밀려오는 낯선 바람에 지워진다.
낯선 곳을 달리는 동안에는 길을 모른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 어디로 달려도 처음 보는 풍경이고, 그 누구를 마주쳐도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다. 나는 자유다. 달리기는 바람처럼 자유를 선사한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아웃렛에 도착했다. 캘거리는 소비세가 5%로, 캐나다에서 세율이 가장 낮은 주에 속해 있다. 때문에 우리가 간 곳은 크로스 아이언 밀즈(CrossIron Mills). 여기서 쇼핑을 왕창 해볼 예정이었다.
폴로 랄프로렌, 아식스, 뉴발란스, 노스페이스, 리바이스, 나이키, 아디다스, 아크테릭스...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아크테릭스는 무슨 바람막이 하나에 100만 원이라니, 옷에다 뭘 넣었길래.
아웃렛을 나와서는 아빠가 캘거리 시내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간만에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가족여행을 가면 혼자 있을 만한 시간이 없다. 드디어 혼자라니, 이제 발 가는 대로 자유롭게 여행을 해볼 셈이었다.
캘거리 시내에 내리자마자 빨간 트램이 철로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여태 호수나 숲만 실컷 보다가 오랜만에 도시의 풍경을 보니, 도시도 도시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도시의 풍경을 뒤로하고 내가 제일 먼저 발을 들인 곳은 파타고니아 매장이었다. 한국에선 비싸지만 캐나다에서는 확실히 저렴하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하늘색 신칠라 후리스 하나를 구매했다.
거리의 화병을 지나면 거리의 악사가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둘은 비슷해 보였다. 둘 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둘 다 거리를 장소로 변모시켰다.
거리의 악사가 노래했던 음악을 한번 들어보자.
거리를 나와 캘거리 중심가를 벗어나자, 저 멀리엔 바우 강(Bow River)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강 중앙에 위치한 프린시즈 아일랜드 공원을 가보려 했지만, 축제 진행으로 외부인 출입을 금지시켜 놓은 탓에 섬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린 나는 바로 옆에서 '평화의 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었다.
다리를 건너 도착한 강 반대편에는 사실 별게 없었다. 지루한 풍경이 계속됐다. 나는 캘거리의 랜드마크인 캘거리 타워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타워로 가는 길에는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가방에서 연약한 우산을 꺼내야 했다. 여행용 우산이랍시고 산 우산은 캘거리의 비바람을 견뎌내기엔 내구성이 약했다. 그래도 덕분에 아까와는 다른 캘거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에 젖은 저녁의 거리는 반짝이며 광택을 냈다.
캘거리의 랜드마크인 캘거리 타워, 사실 특별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리 예쁜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한국의 남산타워가 더 나았다.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돈을 따로 지불해야 했기에, 나는 1층에 위치한 기념품샵만 간단히 구경했다.
샵 안에는 캘거리 타워를 기념하는 마그넷과 각종 키링,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나는 카라비너 키링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는데, 그때 창 밖으로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스콜(squall)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하느라 캘거리 타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나도 타워 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비가 조금 사그라들자, 나는 타워를 나와 트램을 타러 갔다. 집까지 가는 길은 버스가 더 빨랐지만, 괜히 트램을 타고 가고 싶었다. 나는 얼른 티켓 하나를 발급받고는 트램에 올라탔다. 아스팔트에 박힌 철로를 따라 트램이 빗자국을 반짝이며 움직인다. 그런데 웬걸, 트램이 갑자기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트램을 잘못 탄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서니사이드(Sunny Side) 역에 내리게 되었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맑게 개어 있었다. 비 온 뒤 해가 나니 얼마나 눈부신 풍경을 내보이던지, 빗방울에 햇살이 맺혀 보석처럼 반짝였다. 트램을 잘못 탄 덕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창 밖으로 캘거리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솜뭉치를 실타래처럼 풀어낸 구름, 햇살을 머금은 연두빛의 도시. 캘거리에 왜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지 알 것 같다. 사실 나도 여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