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언젠가부터 내 버킷리스트에는 항상 '카약킹'이 따라다녔다. 나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모아나』를 보며 카약에서 자유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날이 오늘이었다.
요호 국립공원(Yoho-National Park)에 위치한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에는 카누를 타는 곳이 있었다. 카약과 카누는 양날 패들과 외날 패들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며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오전 11시, 카누를 타러 에메랄드 호수에 도착한 우리는 어김없이 익숙한 풍경을 발견했다. 캐나다 호수에는 두 가지 클리셰가 있다.
하나, 모든 호수에는 나무로 된 이름표가 붙어있다.
둘, 호숫가에는 데이지꽃이 무조건 피어나 있다.
침엽수에 둘러싸인 에메랄드 호수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에메랄드를 물속에 녹여내면 이런 느낌일까. 나무 사이로 드러난 호수 위에는 새빨간 카누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고, 화창한 날씨 탓에 카누 대기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무 기둥에 걸린 표지판에는 카누 가격이 적혀 있었다. 1시간에 100달러. 여기가 그나마 저렴한 편이라지만, 그래도 100달러라니. 가격이 다소 비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내 버킷리스트니까.
우리 차례가 되자 직원은 우리 네 명에게 서약서를 쓰게 하고는, 구명조끼 네 벌을 건넸다. 남자는 빨간 구명조끼, 여자는 노란 구명조끼. 개인적으로는 노란 구명조끼가 훨씬 예뻤다. 나는 노란 구명조끼를 입은 누나와 함께 카누에 올라탔다.
카누의 뱃머리를 기준으로 뒤쪽이 드라이버석이었지만, 괜히 앞자리에 타고 싶어서 누나에게 감히 양해를 구했다. 앞자리는 공간이 협소해서 다리를 쭉 필 수가 없었지만, 호수 위를 제일 실감 나게 떠다닐 수 있는 곳이 여기였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앞자리에 앉은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누나는 드라이버석에 앉아 큰 노를 쥐고서도 거의 노를 젓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 네 버킷리스트라며."
그래도 나는 노를 젓는 내내 무척 신이 났다. 노가 물결을 따라 부드럽게 호수를 가르면, 배는 좌우로 둥실 흔들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방향을 번갈아 가며 저어야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 조절이 쉽지 않아 뱃머리가 계속 한쪽으로 돌아가곤 했다.
호수가 넓은 탓에 한참을 저어도 제자리인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뒤편의 선착장이 꽤나 멀어져 있었다. 좌우를 번갈아가며 물살을 무겁게 가르자, 저 멀리 낮게도 보이는 산맥이 아주 조금씩 가까워졌다.
우리는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 기슭까지 내달렸다. 나는 잠시 노 젓기를 멈추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호숫가를 따라 우거진 숲,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진 하늘, 투명하게 일렁이는 호수. 목적지를 잃은 카누는 호수의 호흡에 맞춰 제자리에서 둥실댄다.
카누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시선이 낮아져서 그런지, 에메랄드 호수에 완전히 녹아들어 하나가 된 것 같다. 더군다나 이 넓은 호수에는 길이 없다. 어디로든 달려가도 뒤를 돌아보면 물길이 나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모아나』의 한 장면처럼 자유로운 해방감이 솟구치기도 했다.
신난 마음에 노를 거칠게 저었는지 카약 내부로 물이 다 튀어 있었다. 나는 맑고 시원한 호숫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파라핀에 손을 담그면 느껴지는 '따뜻한 치유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건 그 반대의 '차가운 치유감'이라 할만했다. 부드러운 물결이 손을 차갑게 감싸쥔다.
반납 시간이 임박하자 누나도 같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리는 온몸의 리듬을 이용해 노를 저었다. 서로 반대쪽에서 '영, 차, 영, 차' 하고 리듬의 합을 맞추며 노를 젓자, 배는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힘이 부친 탓에 물살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어느새 저 멀리 있던 선착장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에메랄드 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존스턴 협곡과 터널 마운틴 트레일 두 곳을 더 들렀다. 존스턴 협곡은 비로 길바닥이 축축해졌음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길이 아주 협소했던 탓에 통행이 무척 번거로웠다.
아찔한 협곡 사이에 놓인 초록색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자 작은 폭포가 얼굴을 내밀었다.
터널 마운틴 트레일은 사실 산책 삼아 올라간 곳이었지만, 산책길 치고는 꽤 높이까지 올라가야 했다. 우리 가족 중 나 말고는 아무도 정상을 오르지 않았다.
사실 정상에 올라가도 별게 없었다. 뿌연 안개가 밴프의 전경을 다 가리고 있었고, 정상에는 바위덩어리만 깔려있을 뿐이었다.
그간 봐왔던 멀린 호수, 레이크 루이스, 에메랄드 호수에 이어, 내일은 아침 일찍 모레인 호수(Moraine Lake)를 가볼 예정이다. 로키 산맥의 호수가 다 비슷해 보여도, 직접 가보면 매번 내 예상을 깨뜨린다.
내일은 또 어떤 물빛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