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널 패스를 따라
오전 다섯 시 반, 나도 모르게 눈이 일찍 떠졌다.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바라보는데, 피곤한 느낌 하나 없이 이유 모를 개운함이 느껴졌다.
일찍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서자,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당을 내려다보면 풀잎에 송골송골 빗방울이 맺혀있고, 적막한 마을에는 빗소리만 잔잔히 울렸다.
밴프로 가는 길엔 낮은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두꺼운 구름이 낮게 깔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구름진 신비한 광경에 산신령이 도끼라도 들고 나타날 것만 같았지만, 산신령은커녕 소나기만 오락가락하며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차는 빗구름 아래를 달려 며칠 전 왔었던 파크앤라이드(Park and Ride) 주차장에 도착했다. 레이크 루이스 셔틀과 마찬가지로 모레인 호수 셔틀도 이곳에서 출발했는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정각에 출발하지 않고 인원이 찰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금방 도착했던 레이크 루이스와는 달리, 모레인 호수는 셔틀을 한번 갈아타야 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모레인 호수에 도착하자 익숙한 나무 간판 하나가 보였다. 호수마다 하나씩 있는 짙은 갈색의 이름표였다. 뒤편에 보이는 롯지(Lodge)도 간판만큼이나 캐나다스러운 디자인을 갖고 있다.
호숫가 한쪽에는 돌더미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산사태라도 났나 싶었지만 사실 이건 빙하의 흔적이었다. '모레인 호수'라는 이름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는데, 모레인(moraine)이라는 단어 자체가 '빙하가 골짜기를 깎으면서 운반해 온 암석 조각들의 무더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역시 풍경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모레인의 뜻을 몰랐다면 돌무더기를 보고 삭막하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여행 문학가 폴 서루는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경은 거기 있는 사물들의 이름을 알 때 다르게 보인다. 반면에 이름이 없어 보이는 풍경은 지극히 황량하고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토록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카누를 타고 있었다. 비가 와 텅 비어있던 레이크 루이스를 떠올려 보면, 카누도 호수에 무늬를 만들며 하나의 풍경을 더하는 듯하다. 그리고 밴프의 호수가 대개 그러하듯이, 호숫가는 어김없이 침엽수로 둘러싸여 있고, 호수 건너편에는 빙하가 얽혀있는 커다란 산맥이 우뚝 솟아있다. 내가 마주했던 모레인 호수의 첫인상은 다음과 같다.
그간 봐왔던 호수와 비슷한 특징을 지닐 뿐, 실제로 모레인 호수를 보면 그 특유의 물빛이 있다. 사진으로는 담아낼 없는 공간감과 색감이 있다. 특히나 그 물빛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 미묘한 변화를 겪는다.
트레킹을 시작할 때 봤던 물빛인데, 아까보다 물빛이 조금 더 깊은 푸른빛을 내고 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호수가 민트빛에 가까워졌는데, 그 색깔을 표현할 길이 없으니 우선 다음 사진을 보자.
높은 곳에서 바라본 호수의 물빛은 아래에서 바라봤던 물빛과는 또 다르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더 높이 떠오르더니 호수는 더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민트빛도 아니고 청록빛도 아닌 것이, 밤도 아닌데 저렇게 환하게 빛을 낸다. 물이 어떻게 저런 색을 내는 걸까.
한 두시간 쯤 걸었을까. 산 중턱에서 갑자기 초원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고도가 2,000m를 넘어가면서, 점점 묘목 같은 작은 나무들만 듬성듬성 남아있었고, 꽃들도 자그마한 야생화만 살아남아 있었다. 이곳은 식물이 자라기엔 더없이 추운 환경이었다. 저 멀리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빙하를 보면 그 추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가 더 높아지자, 희미하게 고산병이 찾아왔다. 고도 2500m 정도면 고산병을 겪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숨이 차게 걸어서인지 머리가 멍해지고 어지러움도 조금 느꼈다.
내가 어지러움을 가장 심하게 느낀 순간은 이 풍경을 마주했을 때였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작은 호수가 회색빛의 석산을 비추고 있었는데, 이곳의 식생 환경을 보면 수목한계선 즈음이 아닐까 싶었다. 나무의 키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특정 고도에 다다르면,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알파인 툰드라(alpine tundra) 지대에 다다를 것이다.
얼마 안 가 우리는 알파인 툰드라 지대에 다다랐다. 우리보다 위에 있는 산맥들은 빙하나 이끼 정도만 끼어있는 벌거벗은 바위산이었다. 길을 따라 걸어보아도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이끼나 지피식물(地被)들만 땅을 뒤덮고 있었다.
산 한쪽 구석에는 시멘트 가루 같은 쇄설물들이 쏟아내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빙하가 깎아낸 흔적이 아닐까 싶다. 돌 부스러기가 자연의 힘으로 이렇게까지 곱게 깎이다니.
이 지역의 최상위 포식자로 보이는 이름 모를 검은 새다. 하얀 얼룩무늬가 있던 뚱뚱한 검은 새는 인간이 버리고 간 엠앤엠즈(m&m's) 초콜릿을 쪼아 먹고 있었다.
트레킹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미네스티마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호수를 맞이했다는 기쁨도 잠시, 센티널 패스(Sentinel Pass)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금 충격적이었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경사면을 따라 지그재그로 좁다란 길이 나있었다. 위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희미한 지그재그 선이 보일 것이다.
사실 고민도 조금 했었다. 그냥 여기서 되돌아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되는 데까지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물론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사가 높아서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절벽에 놓인 좁은 길을 따라가는게 조금 무서웠다.
절벽길 초반, 시선이 높아지자 호수는 점점 은빛으로 변해간다.
반대편에도 작은 호수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은박을 씌워놓은 것 같이 파란 하늘을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거울의 느낌을 넘어서서 그냥 호수 아래로 하늘이 뻥 뚫린 것 같다.
절벽을 걷다 보면 하얀 눈도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여름에 눈을 보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물론 날씨는 전혀 여름이 아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호수는 어느새 멀어져 있고, 내가 걸어온 좁다란 길이 흙바닥에 돌멩이로 그은 선처럼 나있다.
멀리서 보면 절벽처럼 보이지만, 직접 걸어가 보면 생각보다는 완만하게 길이 나있다. 아무래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맑은 날씨에 이 정도 길이면 꽤 걸어갈 만하다.
드디어 센티널 패스 정상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담력도 좋은지 바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다.
지구의 풍경이라기엔 너무 낯설다. 암석행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빙하가 깎아낸 삭막한 골짜기가 나타난다.
거대한 골짜기에는 풀 한 포기 없다. 빙하가 대지를 깎아낸 U자곡은 그저 텅 비어 있다. 동식물이 부재한, 무생물만이 자리한 이곳엔 한 마리의 새만 날아든다. 아까 봤던 검은 새 그 녀석이다. 다시 반대편을 바라본다.
해발고도 2,611m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길을 따라 점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저 멀리 보이는 호수 두 개와 거대한 빙하 산맥. 자연에 압도되는 느낌이 이런 걸까. 경외감이 어떤 감정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수월했다. 나는 올라갈 때 못 보고 지나친 야생화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 높은 고도에도 꽃이 살아남아 있다니 놀라웠다. 야생화는 아주 작지만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다.
미네스티마 호수로 다시 내려가자, 비가 조금씩 추적이기 시작했다. 배낭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는 산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는데, 빗방울이 점차 거세지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별사탕 같은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주도에서 맞아본 우박은 기껏해야 스티로폼 부스러기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우박은 따가울 정도로 알갱이가 굵었다. 얼음 결정들은 우비와 우산을 마구 두드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아빠는 우산을 뒤집어 우박을 담아내고는 신기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길은 빗길에 미끄러웠지만, 올라왔던 시간에 비하면 내려가는 건 금방이었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즘엔, 나무 사이로 모습을 살짝 드러낸 모레인 호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비가 와서 물빛이 흐릴 것 같다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모레인 호수는 아까의 신비한 물빛을 어김없이 내보였다.
호숫가에 도착한 우리는 아까와는 또 다른 물빛을 볼 수 있었다. 흐린 날씨에 조금은 탁해진 것 같지만, 또 그만한 운치가 있다.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호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반짝반짝 빛을 터뜨린다.
셔틀을 갈아타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엄마와 아빠는 몸이 지치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안그래도 피곤한 등산길에 비가 피로함을 더했나 보다.
차를 타고 캘거리 숙소로 가는 길, 우리는 운좋게도 쌍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도로를 달리던 많은 차들이 무지개를 찍으려 하는지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나는 해외만 나가면 여름 무지개를 본다. 2023년 스위스에서, 2024년 베를린에서, 2025년 캐나다에서.
오늘은 참 운이 좋은 하루다. 비가 와도 하산할 때만 내리고, 그 전에는 맑은 날씨를 내어주었다. 우박이 내리는가 하면 쌍무지개를 내보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다이나믹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내일도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