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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넷째 날.

잠시 스쳐간 땅, 벨기에

A said : 


6.26 Brussel AM 00 : 26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점을 알고 있는 오만한 두 자전거 여행객은 한껏 여유를 부린다. 도심을 빠져나가던 중 유럽에서는 정말 보기 어려울 야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유럽은 축구라는 큰 형님 때문에 야구에게는 발도 거의 못 붙이고 있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잔디 구장에서 야구라니. 만나게 된 계기나 서로의 가장 큰 공통분모, 관심사가 모두 야구라는 접점에서 이루어진 인연인 둘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전거를 세운다. 멋들어진 구장에 비해 굴러 다니는 선수들의 몸가짐들은 많이 어색하지만 너른 들(野)에서 흰 공(球)과 함께 신나게 뛰노는 즐거운 모습들이다. 직접 공을 던지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몸을 겨우 진정시키고 또다시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다시 안장에 앉는다.

 벨기에의 중심지로 가는 길 역시 페달질이 무탈하게 끝나지 않는다. 자꾸 심술부리듯 오는 소나기에 정류장이든 지붕이 있는 곳이든 달리다 멈추고 비 피하기를 반복하면서 50km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겨우 채워나간다. 가끔 지붕 있는 정류장을 전세 내고 음악을 큰 소리로 들으며 분위기도 내 보지만 오늘 만날 친구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젖은 몸이 안 그래도 힘든 다리와 발을 더 괴롭힌다. 

 Brussel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친구의 이름은 Diederik. 어제 만난 Frank 와는 또 다른 벨기에 친구이다. Diederik은 직장 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현재 대학원에서 국제관계와 정치를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그 역시 벨기에에서 동유럽에 있는 체코까지 횡단을 해 보기도 했고 몇 번의 자전거 레이스에 참가해 본 자전거 광이다. “Don’t make something traps you” 서로를 소개하며 간단한 인사를 하는 와중에 들은 기억에 남는 친구의 저 대사(초면인 사람에게 저런 이야기를 진심으로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날이 올까?)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그 꿈을 열심히 현실 속에서 실천해가는 유쾌한 친구이다. 짐을 풀고 나니 간단히 도심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준다. 암스테르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자유보다는 좀 더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다. 소나기가 온 직후여서일지도 모른다. Diederik이 추천해 준 유명하다는 감자튀김 집을 들른다. 옆에서 한국말, 중국말이 들린다. 유명한 곳이긴 한 가 보다.


 운 좋게도 EURO에 참가한 벨기에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란다. 조별 리그가 끝난 후 토너먼트 첫 경기. 평소 머나먼 이 곳의 축구팀 경기까지 챙겨볼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같이 가자는 Diederik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안 갈 수가 없다. 거리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것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한바탕 축제가 벌어질 낌새라 냉큼 쫓아간다. 펍은 경기가 시작되기 한참 전인데도 온통 붉은 차림새로 인산인해다. 한창 상승세를 타던 벨기에 대표팀의 분위기라 모두들 승리를 확신한다. 누가 봐도 벨기에인이 아닌 유일한 둘이었지만 우렁찬 구호들 속에 덩달아 흥분된다. 누가 봐도 벨기에의 확실한 우세. 골이 연달아 터지고 탁자 위의 맥주잔들은 정신없이 비워진다. 골이 터지면 흥을 주체하지 못하며 처음 보는 얼굴과 부둥켜 껴안으며 손뼉을 마주치고, 아쉬울 땐 약속한 듯이 한숨을 쉬고, 그리곤 모든 동작 후에는 항상 손에 들린 맥주 한 잔이다. 완승을 알리는 휘슬이 울릴 때, 서 있는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삑 울리는 휘슬 소리와 동화된다. 함께 소리를 지르다 떨어질 뻔한 고막을 챙겨 겨우 정신을 차리고 펍을 나왔을 때 거리에서는 시합의 종료와 함께 또 다른 축제가 시작된다. 


 길거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란 소리는 다 출동한 듯 즐거운 소란 그 자체이다. 바이올린, 첼로 같이 어울릴까 싶은 악기부터 목이 터져라 악을 지르는 ‘생’ 목소리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혹시 사고가 날까 싶어 나와있는 경찰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깨를 들썩이고 입은 귀 끝까지 걸어 놓고 있다.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뚱이를 흔들며 그날 밤은 살짝 그곳에 살던 사람인 척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보았던 흥에 겨워 골목 사이를 탭댄스를 추면서 거니는 Diederik의 모습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닥에 발을 구르는 것이 성이 차지 않는지 벽까지 탄다. 골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는 모습은 괜스레 따라 하고 싶게 만든다. 그러다 모퉁이에서 역시 함박웃음을 띄운 채 붉은 차림을 한 이름 모를 누군가를 만나면 응원 구호를 서로 외치며 손뼉을 마주친다. 꿈과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할 때는 한없이 진중하던 Diederik은 사랑하는 고향의 삼색 국기와 그 삼색을 자랑하는 축구팀에 열광하는 유쾌한 친구였다. 이렇게 흥에 겨워하면서도 멀리서 온 친구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내내 배려해주고 설명해주며 신경 써주는 그와의 기억은 ‘벨기에’라는 단어가 접해질 때마다 떠오를 듯하다.

P.S.1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기다리던 중,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는 답을 들은 아저씨는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일전에 한국에서 온 애인이 있었다는 뜻밖의 연애사를 듣는다. 그녀는 매우 ‘Charming’ 했다며 마주 보는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이 살짝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이내 한국 여자는 다들 이러냐 저러냐는 질문들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느끼는 점들은 다 비슷한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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