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이름아래 짓밟히는 마음
평범한 하루였다.
벡스코에서 하는 일러스트레이션페어를 보러 가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캐릭터 상품을 잔뜩 보고 기분 좋게 집에 와 맛있는 점심을 먹는.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중충한 날씨를 화사하게 바꿔줄 노란 장우산을 챙겼으니까.
우리 집과 외할머니댁은 가까이에 붙어 있다. 외가 친척들이 할머니를 뵈러 온다고 했는데, 그게 이 날이었다. 어차피 매번 오래 있지도 않았다. 잠깐 얼굴만 뵙고 가는 것 마냥 휑하니 가버렸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도 잠깐 얼굴 비추고 인사만 드리면 될 일이었다. 굳이 같이 점심을 먹거나 차 한 잔을 나눌 일까지도 아니었다.
누나와 함께 일러스트레이션페어를 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누나는 어른들이 있으니 먼저 인사를 하고 집에 가자고 했다. 누나가 외할머니댁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에 모여 식사를 막 끝내고 앉아 있는 어른들이 있었다. 누나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들어갔고, 뒤따라 들어간 나도 어른들이 보이자 반사적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신발을 벗으려는 찰나, 내 귀를 강하게 때리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어디 인사를 그렇게 하냐. 들어와서 제대로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나? 순간 나는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손발은 부들부들 떨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자주 보는 친척들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자리이니 웃으며 인사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저 욕 한 마디에 싹 사라졌다. 얼굴이 굳어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고, 손발은 얼음장처럼 핏기가 가시고 차가워졌다.
"인사, 드렸잖아요."
나는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 그러나 인사를 받은 친척 어른은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혼자 씩씩거리고 계셨다. '어른을 보면 인사한다' 나는 이 당연한 예의를 차렸을 뿐이다. 다른 친척들이 모두 나에게 시선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수치심이 들어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집에 오는 길, 나는 예전에 겪은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명절에 친할머니댁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른들이 안방에 모여 있었다. 나는 어른들을 보며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다. 그중 한 어른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왜 인사를 그렇게 하냐고. 내가 모르는 인사법이라도 있나?
그 어른이 나에게 화를 낸 이유는 '자신의 눈을 마주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어른이 모여 있는 자리였고, 나는 분명 그 어른들의 얼굴을 보며 인사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억울했다. 마침 그 자리에 할머니도 앉아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제가 인사를 안 드렸나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 작은 아버지 안녕하세요.라고 해야지. 네가 잘못했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차피 부모님에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뻔하다. "어떡하겠어. 네가 참아야지. 너도 참 유별나다. 예민해." 항상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참아야 한다.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도 이제 30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어린 사람일 뿐이다.
나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인가?
나는 왜 항상 이런 일에 참아야 하지?
나는 가족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아주 작은 불쾌함은 점점 몸집을 키우더니 어느새 큰 파편이 되어 내 가슴을 쿡, 하고 찔렀다.
나는 무참히 짓밟혔다. 인사를 했음에도 '내 마음에 들지 않게 인사했다'는 이유로. 항상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분위기를 좋게 만들고 싶었다. 가족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니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그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이제 그 단어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