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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Jan 28. 2024

방퉁이와 곰탱이, 빛과 그림자

101.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1부 '방퉁이와 곰탱이' 끝)

그동안 ‘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이름으로 게으르게나마 손녀의 성장 과정을 기록해봤다. 

그러나 이제 손녀는 ‘육아’의 틀을 벗어났다. 아이는 가족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가족은 그런 아이를 이끌어주는 단계가 아니다. 아이는 더는 가족과 집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제 가족 울타리를 벗어나 학교와 친구는 물론 미디어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됐다. 그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가고 있다. 부모는 몰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더는 놀아주거나 보호해 줄 이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병풍’ 혹은 ‘울타리’일 뿐이다. 

손녀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학교생활 적응기였던 1학기 때만 해도 아이는 유치원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선 담임선생님이 돌보고, 방과 후엔 돌봄교실 선생님이 봐주고, 집에 오면 식구들이 돌보고, 학교에선 반 친구들과 놀고, 집에서는 아빠 엄마 할머니와 노는 식이었다. 2학기가 되면서 그런 학교생활이 눈에 띄게 바뀌기 시작했다. 공부도 그랬고, 친구와의 관계도 그랬다. 여러 과목에 걸친 공부는 아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규율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교실에서 지켜야 할 것, 수업시간에 지켜야 할 것, 친구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일 등이 부쩍 많아졌다. 관계에서도 선생님은 무조건 의지하고 기대고 칭얼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으며 친구들도 서로의 욕구가 맞기도 하고 충돌도 하는 사이로 바뀌었다. 신나는 경험도 많고, 갈등이나 마찰도 잦아졌다. 

만두 빚는 계절이 왔다.

그 때문인지 아이는 배앓이나 고열을 자주 호소했다. 1학기 땐 새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그런 경우가 있긴 했다. 수업 중에 아이가 고통을 호소해 두세 번 학원에서 중도에 데려오기도 했다. 그게 전부였다. 아이는 그런 학원에 다니는 걸 힘들어하긴 했지만, 차츰 적응해갔다. 그나마 2학기 들어서면서는 학교생활에 좀더 전념할 수 있게 영어학원 다니는 것도 그만두도록 했다.

그런데 웬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아프니 데려가라는 연락이 학기 초부터 오기 시작했다. 배가 아프다고 하니 데려가라, 열이 높으니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요즘 학교에선 열이 37.8도만 넘어도 귀가하도록 한다고 하는데, 아이는 실제로 열이 높았다. 문제는 희한하게도 집에만 오면 멀쩡해졌다. 이런 일이 10월, 11월이 되면서 더 잦아졌다. 그렇게 조퇴한 날엔 동네병원에도 가고, 심지어 종합병원에서 진찰을 받기도 했다. 어딜 가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라는 게 의사의 진단이었다. 

의사는 가끔 위약(가짜 약)을 처방해줬다. 아이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효과는 백 점이었다. ‘약만 먹으면 아픈 게 싹 낫는다’라고 아이도 좋아했다. 가짜 약이 있어서 그런지, 아이는 머리 아프고 배 아픈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이 사라지자 아이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했다. 

하지만 학교에만 가면 선생님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 엄마가 병원 진찰 결과를 담임에게 이야기하자, 담임은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심지어 정신과 상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담임도 애를 먹었던 것 같다. 그동안 아이는 툭하면 보건실에서 누워있었다는 것이었다. 11월 말 12월 초에는 거의 매일 보건실에 갔다고 했다. 수학 시간을 앞두거나 체육 시간 특히 구기 종목을 할 때면 여지없이 열이 나고 배가 아팠고, 아이는 보건실로 갔다. 방과 후 교실도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좋아한다던 과학실험이었다. 아이 엄마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자율학습 형태의 눈높이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는데도 차도는 없었다.

할머니의 지도를 받긴 하지만, 제 몫 다한다.

그런 아이를 앉혀놓고 어른들은 제각각 주워들은 상식이나 추론에 따라, 혹은 어르고 혹은 달랬다. 어떤 이는 아이가 심약하지 않나, 참을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꾀병을 부리는 것 아닌가, 제각각이었다.

“수학이 그렇게 하기 싫었어? 수학처럼 정직하고 단순한 게 없어. 공식대로만 하면 되는 게 수학이야.” “주원이 발레도 잘 했잖아. 친구들이랑 달리기도 잘 하고." "피구는 공만 잘 보고, 잘 던지면 돼. 맞아도 아프지 않잖아.” “ㅇㅇ이랑 싸웠어? 친구가 좋다고 하자는 대로 하면 안 돼. 상대가 누구던지 주원이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해." "친구한테 미안할까봐 싫은 걸 억지로 하지 마.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해. 그래야 친구와도 우정이 깊어질 수 있어.” 

아이는 만만치 않았다. 어른들이 온갖 상식과 짐작과 추론에 바탕해 추궁을 하거나 타일러도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완성된 만두. 

그러던 아이였는데 12월 둘째 주부터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데려가라는 요구도 없고, 보건실에 가겠다고 하더란 말도 없었다. 신기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변했을까? 어른들은 각자 아이와 한 이야기와 아이의 반응 따위의 정보를 교환했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 가장 유효했을 법한 이야기는 아이 아빠의 경고였다.

1년 전 아이는 아빠랑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했다. 올해도 비슷한 계획을 하고 있다. 이번엔 엄마 아빠가 모두 함께하는 여행이다. 아빠는 아이에게 이랬다고 한다. “주원이가 계속 보건실에 가고, 수학이나 체육 시간을 앞두고 열이 나고 배가 아프면 이번 여행에 같이 갈 수 없어. 산이네 집이나 다루네 집에 있어야 할 거야. 멀리 가서 아프면 어떻게 하겠어. 병원 가기도 힘든데.” “주원이는 튼튼하니까 마음만 굳세게 먹으면 열이 나고 배가 아픈 거 다 이겨낼 수 있어. 아니 열도 안 나게 하고 배도 안 아프게 할 수 있어.” 

처음엔 설마 했지만, 아빠의 경고는 구두로 끝나지 않았다. 조퇴하는 날엔, 아이가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하던 오마뎅에도 갈 수 없었고, 간식도 사주지 않았다. 아이는 눈앞이 캄캄했던가 보다. 

방학을 하루 앞둔 22일이었다. 눈높이 학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더란다. 아이가 배 아프다고 칭얼거린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찔했다. 2주 동안 잘 지냈는데 다시 도진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원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제가 잘 해결해서 보내겠습니다. 제 손이 약손이어서 배를 살살 문질러주면 나을 겁니다.” 

아이는 자율학습을 다 끝내고 돌아왔다. “배 안 아팠어?” “아파.” “선생님이 ‘내 손이 약손’ 하셨어?” “응.” “그래 다 나았어?” “아니, 아직 아파.” “근데 수업도 다 하고, 시험도 다 봤어?” “많이 틀렸겠네.” “아니, 다 맞았어.” “야, 우리 주원이가 아픈 걸 참고 다 했구나.”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는 참고 주어진 학습 분량을 다 끝낸 것이다. 이후에도 이따금 통증을 호소하긴 했지만, 병원에 가거나 할 정도로 아파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가 없었으니 아빠의 으름장 때문이라고들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아이의 통증은 생애 처음 맞닥뜨린 것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아이에게는 능숙하게 해내는 일도 있지만, 애를 써도 적응하기 힘든 일도 있었다. 적응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할 경우, 시작도 하기 전에 지레 자신감이 떨어지고 겁을 먹었다. 그러면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지고, 그 시간이 오면 얼굴에서 열이 오르고, 배도 아팠던 것이다. 

이런 경험을 되풀이하면서 아이는 ‘힘든 일을 비껴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은 아닐까? ‘아파지는 것’ 말이다. 사실 아프기만 하면 떼를 쓰지 않고도 어른들을 모두 굴복시킬 수 있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 심지어 무서운 학교 선생님도 꼼짝 못 했다. 하기 싫은 수업을 빼먹을 수도 있었고, 영어나 수학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됐다. 보기만 해도 찬바람 분다는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빼주고 귀가하도록 하도록 선처했다. 엄마 아빠는 전전긍긍 울상이었고, 할머니는 아이를 그렇게 되도록 한 '죄'를 물어 엄마 아빠를 혼냈다. “어떻게 했길래, 아이가 저렇게 맨날 아프냐!”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주사를 놓을까 봐 걱정은 됐지만, 한두 번 가보니 검사만 하고 주사는 놓지 않았다. 한 알씩 먹는 약도 쓰지 않아 먹을 만했다. ‘아프면’ 만사형통이었던 셈이다.

처음엔 하기 싫은 수업 빼먹고 귀가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조퇴의 문제는 엄마 아빠가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달복달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끌려가야 하는 것도 성가셨다. 가만히 보니 보건실에 가는 방법도 있었다. 거기만 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엄마에게 통보하지 않으니 집에선 알 리 없었다. 추궁당할 염려도 없고,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아이가 나중엔 하루걸러 한 번 정도씩 보건실에 갔다가 수업이 끝날 때면 귀가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아파졌고, 그러면 하기 싫거나 직면하기 싫은 상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처음엔 겁도 나고 짜증이 나서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어쩌면 아이 스스로 ‘나는 아플 것이다’ ‘난 아프다’ 따위의 자기 체면을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수학이나 체육 등 끔찍한 시간이 다가오면 아무런 생각이나 자기 암시 따위를 하지 않아도 귀신 곡하게 배는 아파졌고, 몸에선 열이 올랐다. 

다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꾀병이나 잔꾀 아닌가라는 의심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제 자식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러나 아이의 그런 반응은 꾀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지혜라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아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말이다. 이전까지 아이가 저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울고불고 떼를 쓰거나 신경질 부리는 게 고작이었다. 본인도 힘든 일이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것이어서 자존심도 상하고 계면쩍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른이 받아주지 않으면 속수무책이었다. ‘아파지는 것’은 그런 부작용도 없었다. 얼마나 기특한 방법인가.

그런데 회피하다보니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아빠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강력한 경고를 날린 것이다. 아빠에게도 저 만할 때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주원이, 그렇게 하기 싫다고 배 아프고 열이 나면 한달살이 여행에 같이 갈 수 없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가혹한 경고였다. 

이 경험을 통해서도 아이는 지혜를 하나 더 터득한 듯했다. “세상엔 안 되는 일도 있구나. 엄마 아빠가 좀 둔해 보이지만, 알 건 다 알고 있구나! 그럴 땐 앙앙불락 대드는 것보다 수용하는 게 현명하다!’

아이는 이제 더 아프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아이 몸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기적처럼 모든 걸 해결해주던 습관이 빨리 사라질 리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뒤 수학이나 체육 수업을 앞두고, 혹은 껄끄러운 친구 앞에서 슬금슬금 일어나는 열과 통증을 참아가며 버텼다. 

우주선 탑승 체험

그렇게 아이는 1학년 2학기 마지막 3주를 ‘정상적으로’ 무사히 마쳤다. 물론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세상과의 접촉면이 더 넓어질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도전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아이의 혼란과 고통은 더 커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새로운 지혜를 찾아낼 것이다. 회피하는 지혜는 이미 효능과 한계를 알았으니 무조건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지혜란 세포분열과 같아서, 추론이라는 새끼 치는 방식으로 기하급수로 는다. 

그런 아이 앞에서 부모나 보호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허둥댈 것이고, 때론 ‘자식이 원수’라는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북한의 김씨 집안도 무서워한다는 '중2'가 될 때면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부모나 조부모 그 위의 조상까지도 사실 이런 변화와 성장을 모두 경험했다는 것이다. 모른 척할 뿐이다.

아이의 1학년 2학기가 보여준 변화 아니 폭풍 성장은 나에게도 한 전환점이 됐다. 도대체 따라갈 수 없는 아이를 두고 ‘육아’라니? 이제는 아이에게서 한발 물러나 지켜보는 게 옳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만 그렇게 빨리 변하는 게 아니었다. 나 자신도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다 보니, 한겨울 손발이 못 견디게 시린 것은 물론 소화 심폐 기능을 포함한 신체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더군다나 건망증도 심상치 않다. 부엌에 주전자 가지러 갔다가, 떨어져 있는 행주를 보고는 행주만 제자리에 놓고 빈손으로 돌아온 건 오늘 있었던 일이다. 엊그제는 처남 식구와 점심 먹기로 한 식당 이름을 아내에게서 서너 번 들었지만 끝내 기억하지 못해 출발할 때 아내에게 다시 물어야 했다. 돌아와서도 식당 이름을 되살려보려 했지만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아이도 나도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아이의 변화는 영(榮)과 성(盛)이지만, 나의 변화는 고(枯)와 쇠(衰)다. 아이는 부쩍 크고 가득 채우는 변화지만, 나는 바싹 마르고 텅 비우는 변화다. 아이는 한겨울 통통하게 살 오르는 매화 꽃망울 같다면, 나는 늦가을 열매 떨어진 자리에 남아 말라가는 꽃받침 같다. 내가 한겨울 바닥까지 꽝꽝 얼어버린 침묵의 시내라면, 아이는 입춘 지나 얼음장 밑으로 졸졸 소리 내어 흐르는 시냇물이다. 그러니 이제 누가 누구를 돌본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 기대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고성쇠(榮枯盛衰)라. 꽃핌과 시듦, 성장과 쇠락은 함께 있을 때 그 소중함은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니, 아이가 귀찮아해도 나는 그림자 혹은 배경 색깔로라도 그 곁에 있어야겠다. 그래야 내 앞의 한겨울 흑회색의 그림판에, 동백꽃도 피고 설중매 혹은 납월매도 필 것 아닌가. 

아이를 따라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이제는 버겁다.

지금까지는 나는 아이의 성장에 개입했다. 요즘은 아이가 내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다.

“할아버지, 그것도 몰라? 몇 번 얘기했잖아. 오늘부터 방학이야!” “할아버지 안경, 저기 두었잖아, 양말은 저기 벗어뒀고!” 꼬맹이였을 때 아이에게 내가 했던 것을, 지금은 아이가 나에게 한다. 그 시절 아이는 지청구를 먹으면서도 행복했다. 이제 내가 행복해질 차례다. 아이의 지청구를 먹으면서 말이다. 

앞으로는 내가 나를 바라보며, 나의 변화 즉 로망인지 노망인지 하는 노화의 과정을 기록하려 한다. 물론 아이의 변화도 함께 담아야 한다. 고枯와 쇠衰는 영榮과 성盛과 함께 있어야, 제 모습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눈이 부셔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고,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그저 어둠 뿐이어서 분간을 못한다. 음영을 갖춰야 세상만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아이는 빛, 할배는 그림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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