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지막 열흘

산이 가다

by 곽병찬

다른 동물이 그러하듯 산도 제 죽음을 일찍이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떠나기 나흘 전인 11월 29일부터 저의 겨울 거처인 보일러실에 들어가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줄이더니 12월 1일부터는 단식이라도 하듯 식음을 전폐했다. 생전 그렇게 좋아하던 닭고기 수프도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것만 두어 술 먹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때 27kg에 이르러 장년의 사내도 들기 힘들었던 몸은 환갑 지난 아내도 안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12~3kg이나 되었을까.

그러니까 11월 24일이었다. 정규 일과가 되어버린 아침 산책에 나섰을 때였다. 산이는 200~300m도 안 되는 짧은 산책 중에 완성빌라로 오르는 길에 털썩 주저앉았다. 뒷다리가 무너졌다. 앞다리로 일어나려 용을 썼지만, 뒷다리가 받쳐주지 못하니 버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오가던 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어디 아프냐, 몇 살이냐, 밥은 먹느냐 등. 속이 쓰렸다. 한참을 쉬고 나서야 산은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한때 세검정을 에워싼 능선과 산복도로 12~13km를 달리다시피 다니던 산이었다. 봄까지만 해도 상명대 뒷산을 오르내리는 게 일과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것이 여름이 되면서 급전직하 체력이 떨어졌다. 오르막에선 구순 노인처럼 비척거렸다. 산책 구간을 상명대 주변 1km 정도로 줄였고, 가을이 되면서 500m 정도로 더 줄였다.

산의 산책은 24일이 마지막이었다. 주변이 비탈이니 더는 밖으로 데리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후 산은 집안을 맴돌았고, 29일부터는 아예 보일러실에서 칩거하게 된 것이다. 배고프면 뒷다리를 끌며 나와 사료 한 줌 정도 먹고는 다시 뒷다리를 끌며 돌아갔다.

마침 24일은 김장하던 날이었다. 오후에 딸네가 왔다. 그러나 산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딸네가 오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달려왔던 산이었다. 딸과 손녀가 보일러실로 찾아가 인사를 나눠야 했다. 딸네가 돌아갈 때 보일러실 앞에서 몇 차례 불렀지만, 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헌데 딸네를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산은 딸네가 나간 뒷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어떻게 계단을 올라왔는지, 왜 그랬는지 기이했다. 무엇이 산에게서 저런 힘을 불러냈을까? 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딸과 손녀가 가는 것을 어쩌면 마지막으로 배웅하려던 것 아니었을까? 산이 현관 계단을 올라온 것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산은 끝까지 ‘야생’을 그리워했고, 대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특히 야생성이 강했던 산이에게 평생을 한 집에서 살아도 본래 집은 ‘밖’이었다.

26일이었다. 아침밥으로 고구마와 호박죽을 주러 갔던 아내가 허겁지겁 돌아왔다. 산이가 대문 앞에서 버둥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집 아낙이 아들 경빈이의 등교를 도와주러 나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워 발을 구르고 있더란다. 뒷다리를 운신하지 못하는 산은 비좁은 대문간에서 앞다리에 아무리 힘을 주어 보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가파른 계단 밑으로 갔을까? 산은 여름부터 시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행동이 너무 굼떠 눈을 살펴보니 백태가 끼고 있었다. 매일 씻겨줘도 두 눈가에는 눈곱이 잔뜩 끼었고, 눈물이 흘러 말라붙은 자국이 짙어져만 갔다. 계단을 어찌 오르기는 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내려갈 때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산은 계단을 내딛다가 굴러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밖’으로 돌아가려는 산의 시도는 그렇게 필사적이었다.

30일 아침에도 산은 대문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아내가 안아서 올려왔다. 며칠 새 산은 환갑 지난 아내가 들어 올릴 정도로 가벼워졌다. 배는 뱃가죽과 등이 붙어 있을 정도였고, 앙상한 갈비뼈는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산의 탈출 시도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시도는 있었다. 아마 한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앞집 경빈 엄마가 아침 일찍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산이가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문은 닫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뒤에도 산은 잠긴 대문 앞으로 내려가 있곤 했다.

27일이었다. 112년 만에 가장 많은 폭설이 내렸다는 날이었다. 눈을 치우러 나와보니 산은 눈 덮인 마당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자, 그런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평소 같으면 뛰어올라 왔겠지만,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눈 덮인 개마고원을 바람처럼 달리던 본능이 되살아나 눈밭으로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이튿날에도 전날만큼 눈이 왔지만, 산은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실로 가보니 사지를 뻣뻣하게 편 채 퍼져 있었다. 몸을 동그랗게 구부려 코를 배에 파묻는 자세가 아니었다. 이날부터 아내는 산의 밥그릇과 물통을 보일러실로 옮겼다.

1일 마곡동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마곡동 어머니 댁에 같다. 어머니께서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통 묻지도 않던 산이 안부를 물었다.

“산이는 어떠냐?”

“힘들어요. 걷지도 못하고 보일러실에만 있어요.”

“너네는 이제 치워야 할 게 셋이나 되는구나.”

가슴이 싸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셋’이란 뻔했다.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입을 다물었다. 저녁상을 치우고 ‘산이 핑계’로 일찍 일어섰다. 오자마자 아내는 점심때 먹고 남은 삼계탕의 죽과 고기를 들고 보일러실로 갔다. 역시 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숟가락 떠 먹여주자 그제야 앞다리로 버티고 서서 먹다가 반쯤 남기더란다. 닭죽이라면 그릇 바닥이 뚫어질 정도로 핥던 산이었다.

전날 밤처럼 그날도 산은 밤새도록 짖었다. 우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모를 소리였다. 단발의 커엉, 커엉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새벽까지 계속했다. 왜 그랬을까? 기도를 자꾸 막아대는 가래를 뱉어내기 위한 헛기침일까? 눈 감기 전 사랑하는 사람, 특히 어머니를 찾는다더니 산 또한 제 어미를 불렀던 것일까?

이튿날 아침 남은 닭죽을 가져갔지만, 한두 숟가락 받아먹고는 머리를 돌렸다.

3일부터는 아내가 장시간 집을 비우는 날이었다. 산의 곁을 떠나 있는 게 안타까웠던지 아내는 새벽 눈 뜨자마자 호박죽을 들고 나갔다. 잠시 후 아내는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왼손 중지와 약지 마지막 마디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따지기 전에 빨간약을 붓다시피 소독을 하고 밴드로 지혈을 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왼손으로 산의 입을 벌리고 오른손으로 죽을 떠먹이려는 순간 콱 물고는 놔주질 않아 소리를 질렀지만 그래도 물고 있어 오른손을 머리를 내리치자 그제야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약지의 손톱이 찢어지고, 살이 깊게 패 있었다.

“쟤가 나와 정을 떼려는 건가 봐.”

“괜한 소리 마. 동물들이 죽을 때 되면 먹지 않는다는데 억지로 먹이니 그런 거지. 개는 사람과 달라. 사람에게 대하듯 할 게 아니라 개처럼 대해야 해.”

대답은 차분했지만, 몹시 괘씸했다. 남의 집 개라면 패 죽이겠다고 벌떡 일어섰을 것이다.

아내의 짐을 들고 공항버스 정거장까지 배웅하고 돌아와 보일러실로 갔다. 멀쩡했다면 한 대 걷어찼을 것이다. 그러나 산은 빈사 상태였다. 네 발을 쭉 뻗은 채 옆으로 반드시 누워 불규칙하게 숨만 쉬고 있었다. 뱃속의 것들을 마지막까지 다 배설했는지 주변은 분변 범벅이었다. 사람도 코를 막을 지경인데, 후각이 몇십 배 발달한 개에게는 어떨까? 날씨가 다소 춥더라도 밖으로 옮기기로 했다.

최저온도가 영하 3~4도였으니 풍산개로서는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니었다. 단풍나무 밑에 자리를 만들었다. 호미로 바닥을 고른 뒤 마른 잎을 수북하게 깔았다. 여전히 푸른 아스파라거스 잎을 푹신하게 얹고, 진한 향기가 여전한 생강 대를 덮었다. 그 위에 산을 누이고 다시 생강 대를 펼쳐놓은 뒤 아스파라거스 더미를 다시 덮어줬다. 초짜가 한 초분치고는 그럴듯했다. 그제야 산은 조용해졌고, 호흡도 일정해졌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산을 덮고 있던 아스파라거스 더미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푹 꺼졌다. 야생을 그리워하던 산의 이승에서 마지막 숨이었다. 산은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산이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