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 행

산이 가다

by 곽병찬

산이 우리에게 온 것은 2011년 1월 18일이었다. 상명대학교 후문 밑 비탈마을의 스무 평 정도 마당이 딸린 오래된 주택에서였다. 세대주는 반대했지만, 딸 아들과 아내의 성화를 배겨낼 수 없었다. 사방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주택에서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아내는 특히 환영했다. 세대주가 반대한 이유는 단순하고 무식했다. 떠날 때 힘들다는 것이다. 그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이유였지만, 가족들은 단박에 묵살했다.

올 때는 태어난 지 50일이었다고 했다. 바가지에 쏙 들어갈 크기였다. 강아지를 보는 순간 완고한 세대주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세상의 모든 새끼가 그렇겠지만, 그 놈은 그야말로 귀염 덩어리였다. 털은 온통 순백이었다. 귀는 참나무 여린 잎처럼 접혀 있었고, 바짝 선 꼬리는 동글동글 말려 있었다. 게다가 전해지는 그 혈통이 만만치 않았다.

2000년 4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분단 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풍산개 한 쌍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했다. 3대째 즉 손녀가 낳은 강아지였다. 본관은 함경도 풍산이지만 본적은 대한민국 1번지 청와대였다. 직전 주소지는 경기도 가평이다.

출생 과정은 엉뚱하고 신통찮았다. 성견이 된 손녀 개를 시골집 마당에 묶어놓고 길렀는데 어느 날부턴가 그놈의 배가 슬금슬금 불러오더란다. 놓아 기르지도 않았고 일부러 짝을 맺어준 적도 없었으니, 필경 마을을 떠돌아다니던 동네 개가 그놈에게 씨를 심은 것 같다는 게 견주의 설명이었다. 그랬으니 우리 손에 왔겠지~. 그러나 그런 출생의 비밀은 그가 떠날 때까지 버리지 못했던 야생성의 비밀이었던 것 같다. 그는 태생부터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애비 없이 태어난 치명적인 흠결에도, 강아지는 책에서 읽은 풍산개의 특징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었다. 순백의 털, 접힌 귀, 다른 종에 비해 현저히 큰 발바닥, 떡 벌어진 어깨 등 풍산개의 원형과 판박이였다. 코에 있는 점만 그의 비밀을 슬그머니 알려줄 뿐이었다.

이름은 깊이 고민할 게 없었다. 정을 주지 않으려는 세대주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을 시절 부모가 아기 이름 짓듯이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었다. 산동네에 살고, 세대주의 취미가 등산이고, 종자의 이름에도 산이 있으니, ‘산’이라고 지었다. 이런 속내를 모르는 다른 가족은 강인하고 의젓하고 너그러운 뫼(산)의 덕성을 생각하며 열렬히 찬성했다.

한동안 집안에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개마고원을 내달리던 본능을 이어받았기로서니 손바닥만 한 놈을 내보낼 순 없었다.

산은 점잖았다. 식구를 쫓아다니며 추근대지도 않았고, 이리저리 뛰지도 않았다.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킁킁대는 게 일이었다. 문제는 배변이었다. 물론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훈련받을 자세도 되어있지 않았다. 알음알음 배운 대로 이것저것 해봤지만 내키는 대로 오줌도 싸고 똥도 눴다. 세대주는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다른 식구들은 좋아라고 쫓아다니며 치웠다. 신문 대신 배변 매트를 구해 깔아줬지만, 거기에 누기는커녕 단박에 물어 뜯어버렸다.

먹이는 우유로 시작했는데 왕성한 식성을 감당할 수 없어 한 달쯤 지나면서 사료로 바꿨다. 그때부터 산의 몸집은 빵 반죽이 부풀 듯이 하루가 다르게 컸다. 동시에 배변량도 많아지고 냄새도 만만치 않았다.

3개월쯤 되어 춘분이 지나고 날이 풀리자 밖으로 보냈다. 본인도 원하는 바였는지 환호작약하는 것이 눈에 여실했다.

집을 마련해야 했다. 아내는 풍산개의 위풍에 맞아야 한다며 목재상에서 나무로 제작한 정통 개집을 샀다. 싸고 튼튼하고 물청소하기도 쉬운 플라스틱 개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새끼 곰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개집은 근사하긴 했지만, 곧 성가신 짐 덩어리가 되었다.

산은 봄이나 여름은 그렇다 해도 심지어 한겨울에도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뒷밭 부엌 쪽 벽에 기대서 웅크리거나 현관 옆 작은 방 벽에 붙어서 잤다. 뒤란에서 쫓아내면 마당 왼쪽 담 밑 아스파라거스밭을 제집으로 삼았고, 뒤란에서 쫓아내면 앞마당으로, 앞마당에서 쫓아내면 현관 옆으로 옮겼다.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산은 개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여느 개들은 막힌 곳을 좋아한다는데 트인 곳만 찾아다녔다.

그렇다고 한겨울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질 때는 밖에 놔둘 순 없었다. 시치미 뚝 떼고 똥고집을 부리는 걸 보면 부아가 났지만 노숙하다 동사할까 싶어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현관으로 억지로 끌고 와 재우기도 했다. 그러나 늦도록 낑낑거리고, 문을 긁어댔다. 억지로 재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개도 사람도 불편했다.

가만히 보니 산은 별나게 좋아하는 게 있었다. 짚더미였다. 생강밭 멀칭 용으로 김포 들판에서 볏짚을 주워오곤 했는데, 산은 짚이 쌓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맞바람 부는 라일락 나무 밑에건, 종일 볕이 들지 않는 단풍나무 밑에건 짚더미에 올라 꼬리털로 코를 감싸고 잤다. 남은 볏짚을 개집 안에 깔아줬다. 처음엔 몇 번 들어갔다. 그러나 곧 볏짚을 밖으로 끌어내 밖에서 잤다.

산의 마당 생활을 하면서부터 집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 나가더니 산은 내가 나올 때만 되면 현관 앞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렸다. 평소 불러도 잘 오지 않는 놈이었다. 심지어 먹을 것을 들고 얼러도 오지 않았다. 던져놓으면 그제야 호기심을 보이고 다가갔다.

처음엔 그야말로 동네 한 바퀴였다. 상명대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오거나, 산 아래 버스 정류장까지 한 바퀴 돌아서 올라왔다.

산책을 시작하면서 다행스럽게도 산이의 집안 배설은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누고 쌌다. 개인 주택이 많은 동네여서 개를 기르는 집이 많은데, 그 집 앞에는 반드시 오줌을 눴다. ‘개 오줌 금지’라는 팻말이 있기도 했는데, 집주인의 경고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그 팻말에 대고 쌌다. 똥도 한두 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을 쌌다. 네 번째부터는 눈이 퉁방울이 되고 허리가 활처럼 휘어질 정도로 힘을 주어도 물똥만 찔끔 나올 뿐이었다. 오가는 사람들 눈총이 따가웠다. 덩어리는 그런대로 수거하지만, 물똥은 치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사람 발길이 덜한 상명대 뒷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제 변을 숨길만 한 곳을 찾아 누는 게 습성이니, 산도 나도 편했다. 평생 가장 많이 동행한 길이었을 것이다.

휴일 집에서 쉴 때면, 산책 거리를 늘렸다. 세검정 큰길을 건너 백사실로 가거나, 등산객이 덜 찾는 탕춘대 능선 상명대 쪽을 한 바퀴 돌았다. 산이 커갈수록 더 길어져, 한참 때는 구기동에서 평창동까지 산복도로를 따라가다가 형제봉 매표소에서 산으로 올라가 여래사를 거쳐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팔각정을 지나 능금마을, 백사실로 내려와 집으로 다시 올라오기도 했다. 30리는 족히 되는 길을 산은 전혀 지치지 않고 잘도 다녔다. 때론 탕춘대 능선으로 올라가 홍은동 극동아파트를 거쳐 포방터시장으로 내려가, 홍제천을 거슬러 세검정초등학교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참 어지간히도 긴 동행이었다. 함께 쏘다닌 걸 합치면 한반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10차례는 왕복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먼 길을 산과 동행한 셈이었다. 아내와도 함께 산에도 가고 산책도 했지만, 총연장으로는 족탈불급이다. 산을 아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매일 다녔기 망정이지, 안 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산보다 먼저, 술병으로 먼저 몸이 망가졌을 것이다. 산과의 산책은 나의 해장이고 보약이었다.

산은 어디서나 마치 제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매일 밥을 주는 사람에게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간식을 달라고 혹은 놀아달라고 추근대지도 않았다. 주면 그만 안 놀아줘도 그만이었다. 다만 닫힌 문밖으로 나가는 것만은 달랐다. 집주인의 손에 달려 있으니, 아침이면 다소곳이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때론 대문 앞으로 먼저 가서 대기했다. 잠깐 고개를 숙이더라도, 제 야생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가는 날까지 제 고집을 굽히지 않고 야생성을 유지한 것은 바로 이 오랜 동행 혹은 제한되긴 했지만 ‘잠깐의 탈출’ 덕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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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에게만은 예외였다. 둘은 2016년 갓 태어났을 때부터 동행하는 사이였다. 산은 아이만 오면 달려가 그 앞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팔다리를 흔드는 것도 지켜봤다. 아이가 저의 서너 배나 되는 맹견의 코를 겁도 없이 만져도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손을 핥거나 볼을 핥아주었다. 제 자식인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커가면서 세검정 산비탈 외갓집을 찾은 것은 거의 80% 산 때문이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외갓집에서 한 일은 산과 산책하는 것이었다. 상명대 운동장을 돌거나 동네 한 바퀴를 하는 것에서 시작해, 아이가 커가면서 백사실로, 홍제천으로 거리를 늘려갔다. 백사실은 아이가 가장 사랑하는 코스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가 오면 무조건 나갈 준비를 해야 했고, 아이의 방문이 뜸해지면 산을 앞세워 유혹했다.

장년의 산과 유년의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동행자였다. 아이에게 산은 호위무사였고, 산에게 아이는 천진의 순도가 꼭 맞는 사이였다. 산과 함께 백사실에 갈 때면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의전했고, 산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걸었다. 아이는 산의 꼬리를 잡으려 쫓아가고, 산은 그런 아이의 궁둥이에 머리를 들이대려 쫓아가는 그런 모습이었다.

11월 24일 김장하던 날이었다. 아이가 왔지만, 산은 보일러실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불러도 나와보지 않았다.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봐야 했다. 귀가하면서 다시 부르고 또 불렀지만, 산은 나오지 않았다.

뒷문으로 나가는 딸네를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산은 뒷문 앞에서 비틀비틀 서성이고 있었다. 일주일 가까이 현관 계단을 오르지 못한 산이었다. 마당에 나오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계단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산은 그야말로 젖먹던 기운까지 내서 계단을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아뿔사! 아이는 그만 가버리고 말았다. 산의 마지막 배웅, 그리고 짧은 동행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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