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산티아고 계획을 짜다
다섯 번째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 de Compostela계획을 세웠다.
이쯤 되면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왜 또가냐고 묻는 경우보다 '아, 또 가는구나' 하고 만다.
나 역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려고 헛수고를 하지 않고 그냥 대답한다.
'방학인데 가야지'
심지어 나는 산티아고를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들과 한두 차례 다녀온 사람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말한다.
'어서 다녀오세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다녀오세요!'
내가 내린 결론이 바로 그것이다.
"산티아고를 가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한 번이라도 더 가서 걸어라."
올해는 6월 말에 떠나서 8월 중순에 돌아온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몰아 쓰느라 인천 ICN-바르셀로나 BCN직항이다.
못된 대한항공이 올해까지 마일리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수만 마일의 마일리지를 무효화시켜 버리기 때문에 작정하고 있었다. 기왕 쓰는 거 왕창 몰아서 비즈니스석으로 발권했다.
스페인으로 가는 편 오는 편은 왕같이 가지만 정작 스페인에 내려서는 고행하는 순례자처럼 걷고 또 걷고 허름한 곳에서 자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2013년 프랑스길, 2015년 포르투갈길, 2019년 북쪽길, 2022년 은의 길(일부)을 걸었다.
은의 길을 걷다가 말아서 다시 걸어야 하지만 한여름에 은의 길은 거의 불가능한 구간이라 이번엔 어렵다.
스페인 지도를 책상머리에 붙여두고선 몇 날며칠을 구상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굳히지는 못했다.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코스는 초반에 아라곤길 Aragon Way을 걷고 프랑스길과 합류해서 레온 Leon까지 걷다가 산살바도르 Camino San Salvador길로 갈아타고 오비에도 Oviedo까지 간 다음 북쪽길 해안코스를 따라서 산티아고로 입성하는 코스인데 내 일정을 다 커버하기에 며칠 모자란다. 온전히 이 코스를 걸으려면 아주 빨리 걷거나 프랑스길 중간 메세타 구간을 교통편을 이용해서 이동해야 한다.
그동안 네 번의 카미노 경험이 있지만 올해는 좀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은 봄에도 만만치 않은데 이번에는 7월 8월 한여름에 걷는 거라 낮동안은 힘들고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제한적일 것 같다.
원래도 나는 새벽에 출발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새벽 4시 반쯤 일어나 5시쯤에는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오 12시에 걷기를 마친다면 7시간은 걸을 수 있을 테니 하루에 25-30km쯤으로 예상해야 한다.
늘 떠나기 전에는 이번에는 천천히 걸을 거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스페인에 와서는 서두르고 빠르게 걷게 돼서 그동안 후회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천천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예쁜 스페인을 충분히 느끼면서 걸을 것이다. 걷다가 적당한 그늘과 괜찮은 말벗이 있으면 판초 깔고 앉아서 쉬다가 걷고 여유 있는 날이라면 땡볕을 피해 낮잠도 한번 자보는 시도도 해 볼 작정이다.
지난번 북쪽길 카미노는 나에게 참 큰 감동과 기쁨을 준 순례였는데 그런 좋은 결과를 얻게 된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나의 배낭 무게였다. 배낭은 늘 7kg 정도였고 여기에 간식과 음료를 더해도 8kg쯤이었으니 등이 배기고 무거워서 힘이 든 경험은 없었다. 반면에 작년 겨울 은의 길은 배낭 무게가 상당했다. 그래봐야 10kg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3kg 차이가 생각보다 순례의 질을 크게 좌우했다. 은의 길 때에 맸던 배낭은 순례길을 직접 걸어보고 제작한 국내산 '킬리' 배낭이어서 내심 기대가 컸는데 실제 사용해 보니 가방 무게가 무거웠고 멜빵끈과 허리벨트가 내 몸에 잘 맞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리뷰가 많이 달리고 순례자에게 특화된 배낭이라고 해도 나하고 궁합이 맞지 않으면 무쓸모다. 돌아오자마자 이 배낭은 당근으로 처리했다.
이번 카미노 역시 새로운 배낭을 갖고 가는데 얼마 전 구입한 피엘라벤의 35리터 아비스코 프리루프트이다. 얼마 전 내변산 산행에서 처음 사용해 봤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카미노 배낭에서 중시하는 것은 배낭의 안쪽 깊숙이 넣어 둔 물건을 꺼낼 수 있도록 마련된 측면 지퍼나 전면 개방 기능이다. 하루에 6-8시간을 걸으면서 여러 번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배낭 속 물건을 꺼낼 필요를 느낀다. 5시간 이하의 짧은 산행이면 그럴 물건들을 배낭 위에 넣어두거나, 상단 덮개 지퍼 속에 휴대하는데 한 달이 넘는 동안의 물건들은 각자의 자리가 정해지고 이를 웬만하면 지켜줘야 물건을 찾을 때 빠르고 쉽다. 이 물건은 배낭의 어디쯤에 있다는 각 물건마다의 위치도가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배낭을 전면개방하거나 적어도 측면 개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피엘라벤은 전면개방이 시원하게 열려서 이 점에서 나를 만족시켰다. 거기에다 등에 배낭이 달라붙지 않고 사이가 뜨게 프레임을 사용하여 땀 배출이 용이하고 등에 통풍이 되게 한 것은 한여름 스페인 들판을 걷는 나에게 유리한 기능이 될 것으로 본다.
지금 고려 중인 것은 등산화이다. 신던 것, 반쯤 닳아있는 것을 신고 가서 돌아올 때 버리고 올까, 아니면 얼마 전 구입한 로우컷 등산화를 신고 갈까 하는데 이건 출발할 때 결정해도 될 것 같다. 둘 다 이미 내 발에 최적화되어있기 때문이다.
항공권은 이미 확보했고 도착일 바르셀로나 숙소도 공항 근처로 예약했다.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는 바르셀로나-사라고사행 고속철 renfe도 예약했다. 사라고사에서 Canfranc행 열차를 예약해야 하는데 이것은 아직 예약창이 열리지 않은 상태이다. 프랑스길로 시작을 할까 아라곤 길로 갈까 망설였는데 이미 마음이 아라곤 길로 기울어졌다. 피레네 산속에서 보내는 초반 5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