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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고 싶은 자와 갈 자

by 이프로

내가 스페인 순례길을 좀 걸어봤다고 하면 청년, 중년할 것 없이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묻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벌써 이 순례를 다녀왔는지 모두들 순례 다녀온 지인 한둘씩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언제 언제 갈 생각이라고.

이들은 이미 한국의 아름다운 길을 놔두고 왜 스페인까지 가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저마다의 이유는 다 갖고 있는 듯하다. 그들 중 일부는 올레길이나 둘레길 등 예습도 해 둔 이들도 많다.

직장인의 경우 언제 휴가 또는 휴직, 심지어 퇴사를 할 건지, 학생의 경우는 언제 휴학하고 다녀올 것인지 사뭇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들의 순례 계획에 선뜻 동조하지 않는다.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초행자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야 할 이유와, 역시 그만큼의 가지 못할 이유가 공존하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초행자라면 의례히 똬리를 틀고 있는 장기간의 도보 여행에 대한 공포심도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자신보다 더 나를 아껴주고 살뜰히 챙겨주는 형이 있다.

형들이 여럿이지만 62년생 바로 윗형은 나와 제일 소통도 잘되고 어릴 때 자주 놀아주기도 했다. 지금이야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자주 못 보지만 21세기 IT를 이용해서 서로의 근황은 주고받고 있다. 내 형은 보스턴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급 마라토너이고 나는 등산과 트레킹으로 취미활동을 하고 있으니 평소에는 기회가 올 때마다 서로의 취미를 권한다. 형의 권유로 나는 작년부터 마라톤을 시작했고 형은 내 기록을 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꾸준히 산티아고 얘기를 했고 드디어 형은 나와 함께 가기로 결심을 했다.

애틀란타에서 보험 에이전시를 하는 형은 개인사업자와 프리랜서와 직장인을 섞은 것 같은 이상한 형태의 근로를 했는데 마음만 먹으면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형이 같이 가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동안의 산티아고 순례 계획을 소상히 들려주곤 했는데 이번 여름의 계획을 듣더니 자기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형이 같이 갈 수 있다니 나는 다시 일정과 경로 등을 알려주고 정말로 가능하겠는지, 다시 말해 일을 그만큼 오래 비워도 되는지, 형수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는데 좋다고 했다.

와, 이런 날이 오는구나... 오래 떨어져 지내다가 내가 미국에 가거나 형이 한국에 나와야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대면한 것이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형에게 내 비행기 출도착 정보를 알려주고 어서 발권부터 하라고 했다.

여름이라 표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여차하면 형이 하루 이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거나 내가 하루 이틀 기다리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내가 이미 예약하고 발권해 둔 스페인 숙소와 기차 편 생각이 났다.

나는 당연히 나 혼자 여행이니 바르셀로나 도착 후 공항에서 가까운 도미토리 1박 후 Zaragoza로 이동하려고 기차표를 끊어 두었는데 이제 두 사람으로 인원이 늘어난 것이다. 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서 전화를 할까 했지만 미국과의 시차 때문에 마음대로 전화하기도 어려웠다.

다음날 다시 얘기를 해보니 나와 같은 날 바르셀로나 도착이 가능한 표가 있다고 했다. 나는 어서 그것으로 발권을 하라고 하고 여권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예약해 둔 호텔의 도미토리 룸을 취소하고 일반 객실 방으로 다시 예약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renfe 기차표도 형을 위해 예약하려면 여권정보가 필요했다. 그런데 형이 여권이 없다고 황당한 말을 했다. 여권 유효기간이 석 달도 남지 않아서 얼마 전에 새 여권을 신청했는데 2주쯤 걸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존 여권의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 예약을 위해서라도 갖고있는 여권 사진을 보내라고 하고 나는 내가 예약해 둔 호텔을 취소하고 다시 예약했는데 기존 내 예약은 환불불가로 결재를 해서 고스란히 숙박비를 날려야 했다.


나와 형의 여권 정보로 이번에는 일반 객실을 예약했는데 여름방학 철이라 그런지 방이 딱 하나 남아 있었고 요금은 내가 예약할 때와는 훨씬 비싼 요금으로 올라있었다. 호텔 예약을 마치고 이번에는 기차표를 예약했는데 내가 예약하던 두어달 전에는 10유로도 안하던 기차표가 60유로도 넘게 올라있어서 아연실색했다.

기가 막혔지만 형의 이름으로 기차표까지 발권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 형과 함께 40여 일을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형을 케어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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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날 새벽 안 그래도 일찍 일어나는 나인데 내가 깨기도 전에 카톡 음성통화음이 울렸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형이었다. 안 그래도 여권이 새로 나왔는지 아침에 일어나 물어보려고 할 참이었다.

"야, 어떡하냐, 나 이번에 못 가겠다."


이런저런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어제까지 나와 배낭과 등산화를 얘기하던 형이 못 가게 돼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그래, 그럴 수 있지, 걱정 말고 다음에 기회 되면 가자" 하고 이야기를 마치고 통화를 마쳤다.


그럴 수 있다.

그러니 초행자인 것이다.

안 가본 길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의 외유는 가능한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늘 "발권부터 하고 오시면 얘기해요." "표 끊으셨어요?"라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자인가를 확인하곤 했는데 내 친형에게는, 아뿔싸 그 절차를 잊은 것이다.


나도 첫 순례를 계획할 때 망설이고, 번복하고를 되풀이했을 것이다. 누구나 이 길고 낯선 여정을 충동적으로, 우발적으로 동했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몰려오는 공포와 현실의 인식에 '되돌리기' 버튼이나 UNDO 버튼을 슬며시 누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형과의 통화에서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로 가고 싶고 다시 생각해도 가고 싶을 때 가야 해. 안 그러면 가서도 안 재밌어. 잘했어. 나중에 가."


나는 진심이었고, 그리고 여정 내내 형을 보살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것에서도 다행스러웠다. 그 대가로 나는 비싼 돈을 주고 예약한 일반실에서 편하게 첫날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기차에 타서는 내 사랑스러운 배낭을 짐칸이나 복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 옆 좌석에 앉혀둘 수 있게 되었다.


가고 싶다면 잘 생각해 보시고, 정말로 갈 거라면 발권하시라.

그전까지는 그냥 꿈꾸는 순례자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른 이의 순례기를 즐기면 된다.


배낭 걱정, 침낭 걱정, 우비냐 우산이냐 걱정, 목 있는 등산화 걱정, 크록스가 나을지 슬리퍼가 나을지 걱정, 길 찾는 걱정, 기차 타는 걱정, 스페인어 걱정, 알베르게 걱정, 식사 걱정, 크레덴셜 걱정, 돌아오는 차편 걱정, 순례 마치고 포르투갈 가는 걱정, 환율 걱정, 귀국 선물 걱정, 순례 마치고 갈아입을 옷 걱정, 고추장이 나을지 고춧가루가 나을지 걱정, 라면 수프를 어디서 구할지 걱정... 이런 걱정은 발권 후에 시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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