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 마지막주의 서울시내 총격전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정류장에서 검은색 동복 차림으로 서대문을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차 안의 공기가 평소와는 좀 달랐다. 출근길 버스 안은 직장인과 등교하는 중고생들로 가득 차고 의례히 버스 기사는 라디오 뉴스를 틀어놓기 마련인데 버스 안이 조용했다. 나는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인창중학교 1학년 생이었는데 버스가 무악재를 넘어서 독립문 로터리로 향할 때쯤 무심코 창밖 풍경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인도가 하얗게 덮여있는 것이다.
'벌써 눈이 내린 건가?'
아니었다. 버스가 차선을 바꿔 인도 가까이로 가자 거리를 덮고 있는 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눈이 아니라 신문지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신문지를 마구 뿌려놓은 것이다. 늦가을 아침에 부는 바람은 그 신문지들을 이리저리 흩날리게 했고 일부는 차도로까지 날아들어왔는데 운전기사도 어른 승객들도 잠자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이러쿵 언급이 없었다.
내 느낌에 버스 안 어른들은 벌써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아침에 도시락을 건네주던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 집에는 나와 형들이 중고생이어서 아침에 도시락만 네다섯 개씩 싸야 했는데 엄마는 그래서 아침에 정신이 없었다.
아직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지난밤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감리교 신학대학과 동명여고가 있던 서대문 로터리에 내려서 학교에 가려면 서대문 우체국을 돌아서 경기대학교 방향으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그제야 나는 길바닥에 떨어진 호외를 집어 들었다. 호외가 뭔지 당시에는 몰랐는데 평소에 보던 동아일보가 달랑 한 장짜리인 것이 신기했고 옆에는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다른 신문사에서 발행한 호외도 같이 섞여 있었다. 신문사는 달라도 무지막지하게 큰 활자로 쓰인 헤드라인은 다 똑같았다.
朴正熙 大統領 逝去
박정희 대통령까지는 읽을 줄 알았는데 뒤에 두 글자가 뭔지 좀체 알 수 없었는데 나머지 신문 내용을 유추해 보면 대통령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도 호외를 집어 들고는 바쁘게 발길을 옮겼는데 아무도 호외 내용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저마다 집어 들고 온 호외를 꺼내 들고 대통령이 죽은 게 맞느냐, 아니다로 웅성댔지만 대부분은 설마 대통령이 죽었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의견은 갈렸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담임선생님은 평소대로 조회를 하고 곧바로 1교시가 시작됐는데 내가 좋아하는 국어 시간이었다.
당시에 미혼이었던 젊은 여선생님이셨는데 누군가 선생님께 길에서 주운 한 장 짜리 신문 호외가 뭔지 물었다.
당시 서울의 중학교 한 학급은 70명이었으니 지금의 두 배가 넘는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한 건데 그날 아침처럼 70명의 학생이 집중해서 선생님을 쳐다보는 일은 드물었다. 상냥하고 자상하게 우리를 대해 주시는 몇 안 되는 선생님이셨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말을 아끼셨다. 나라에 슬픈 일이 생겼고 아이들은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을 것, 그리고 오늘은 아마도 오전 수업만 하고 하교할 텐데 다른 데로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하셨다.
평소 같으면 2교시만 끝나도 도시락을 까먹고 뛰어다니며 시끌벅적 떠들어댔을 텐데 모두들 쉬는 시간에도 조용했다. 학교는 오전 수업이 아니라 3교시가 끝나자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사람도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고 몇 차례나 신신당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가 있는 서대문에서 MBC가 있던 정동 문화방송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금방 세종로였고 거기서 광화문, 중앙청, 청와대는 모두 지척거리여서 이미 군인들이 쫙 깔려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밤 12시 통금이 있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미 통금도 두 시간이나 앞당겨져 10시 이후에는 모든 국민의 외출이 금지됐다.
텅텅 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도 이제는 소식을 들어서 내가 집으로 들어오자 '이게 무슨 일이라니.' 하시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셨다.
엄마와 나는 라디오를 틀었는데,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오후 6시부터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는 모든 정규 방송을 다 중단하고 계속 슬픈 조곡이 나오다가 가끔씩 아나운서가 대통령의 서거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졌고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짧은 뉴스만 반복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서거 (逝去)'라는 단어를 접했고 누군가가 죽은 것을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모아 온 여러 신문사의 호외를 이리저리 늘어놓고 다른 듯 하지만 같은 내용의, 그리고 길게 늘어 썼지만 결국 대통령이 죽었다는 말 외엔 별 다른 내용도 없는 마치 학급 신문같이 보이는 어설픈 기사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대통령은 태어나면서부터 박정희였고 늘 박정희였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형들과 누나도 늘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뿐이어서 우리는 대통령이 바뀌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로 상상도 해본일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니, 그럼 이제 나라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대통령이 죽으면 누가 매일 뉴스에 등장할는지 좀체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문득 나는 내가 더 어렸을 때, 아마도 국민학교 2, 3학년 때쯤의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숨진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 문세광! 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당시에 우리 이모는 독립문 근처 영천에 살고 있었는데 육영수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몇 달 있다가 어느 날 밤 시장 보러 나왔다가 엄청난 인파가 모인 것을 보게 됐는데 그날이 바로 육영수 여사를 죽인 문세광이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던 날이라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먼발치로라도 문세광을 향해 욕을 하고 구경을 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그럼 이 부부는 둘 다 남의 손에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건가? 궁금한 게 무척 많은 날이었지만 가족들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속시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른들도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고 그들도 역시 답을 모른다는 것을 나도 느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모처럼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보려 했으나 별 다른 소식이 없었고 라디오를 켜자 긴급 뉴스가 흘러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다 빼놓고 대충 알려주는 뉴스의 내용은 계엄사령관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남동 일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12.12 사태로 이날밤 한남대교의 통행이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해병대 중위로 제대한 큰형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집으로 오려면 한남대교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모두 걱정이 컸다. 큰형은 통금 시간이 조금 못되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버스들이 멀리 돌아서 오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고 무장한 군인들이 시내에 돌아다닌다는 소식도 전했다. 아버지와 큰 형은 아직 학생인 우리 동생들에게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 있을 것과 해지기 전에 귀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곧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고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내 주위의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일상을 보냈다. 나는 집에만 있기 심심해서 도서관에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도서관은 경복궁 옆에 있었다. 거길 가려면 우리 집에서 59번 버스를 타야 했는데 세검정을 지나 청와대 뒷길로 효자동을 거쳐 좌회전을 하면 중앙청 앞의 광화문을 지나고 한국일보사 앞에서 내려 걸어가면 목적지인 정독도서관이 나왔다. 이때 생경한 풍경이 있었으니 북한군과 싸워야 할 탱크 두 대가 중앙청 앞에서 육중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포신을 시민들이 생활하는 세종로 쪽을 겨눈 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 앞에는 군인들이 무장한 채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평시와는 다르게 위장한 군복을 입고 있어서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 지금 시국이 몹시 위태롭고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 때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격동의 1979년을 지나 그 이듬해에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는 광주와 전남시민들에게 공수부대원들을 보내서 학살을 자행하고 정치인들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대학생들과 야권인사들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시위와 투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인 중학생 시절 내가 살던 홍제동 우리 집의 10km 반경 안에서 벌어졌던 신군부의 쿠데타와 박정희 이후 또 다른 군사정권이 집권하게 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