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부대 문화선전대 2

공연 준비

by 이프로

군악대에서도 역시 나처럼 입대한지 얼마 안되는 이등병이 있었는데 그들 중 얼굴이 반반하고 키가 큰 두 명이 연극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도와주기로 하고 나는 하극상이라는 사고를 치고 북으로 월북하려던 주인공을 설득하는 병사 역할을 맡았다. 연극 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짧지 않은 대사가 두 번 있는 역할이었다.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자대에서 있었더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역과 일과를 마친 후의 스트레스 쌓이는 내무생활을 생각한다면 견딜 수 있었다. 타부대 파견 생활이 주는 여유있고 특권층 같은 예외적 일과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저녁 식사 시간 이후에 '그냥 TV를 보며 놀다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당연히 야간 보초 근무도 없었다.

문선대 파견병은 파견을 나올 때 완전군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외출이나 외박을 나갈 때처럼 비무장 차림으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총도 없었다. 군복만 입었다 뿐이지 나는 군인이 아닌 생활을 했던 것이다.


하루 일과는 아침 식사 시간 전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점호 없이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며 시작된다.

본부대 취사장은 장교식당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늦게 식사하러 갔기 때문에 밥이 다 떨어져서 장교 식당으로 나가는 부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메뉴였지만 사병이 장교 식당 밥을 먹는다는 것은 큰 혜택처럼 여겨졌다.


식사 후 연습장인 본부대 강당으로 오면 밴드단원들이 각자 악기 음을 맞추고 연습에 들어갔고 우리는 강당 한쪽 대기실에 모여서 연극 대본을 고치고 리딩을 하는 연습을 했다. 나는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사를 읽는다고 혼이 많이 났는데 생각보다 정말 힘들었다. 나는 그냥 대화하듯이 나름 자연스럽게 대사를 읽었는데 연극 연기에서는 실제보다 상당히 과장되게 연기를 해야 잘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멀리서 보는 관객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리액션이 크고 대사도 큰 소리로 발성을 해야 전달이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연극 준비를 맡은 상병은 때리지는 않았지만 하도 구박을 해서 나는 그 앞에서는 기를 피지 못했다. 춘천에서 극단 생활을 했다는 그는 내가 봐도 시원시원하게 연기를 했고 대사 전달력도 좋았다.

그렇게 스트레스 쌓이는 오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점심 식사 후에 가끔씩 정훈 참모와 회의를 할 때가 있었는데 하루는 정훈참모와 정훈부 대위가 나에게 낙원상가를 잘 아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알다 뿐인가.

낙원상가는 내가 실제로 일한 적 있는 음악다방 '로망스'에서 지척 거리에 있는 악기 전문상가로 위층에 허리우드 극장이 있었고 각종 악기 전문점들로 가득 찬 '딴따라' 상가였다. 나는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도 여러 번 있고 악기 구경을 하러 상가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 적도 있었다.


'그럼 너 거기서 오부리 시장 설 때 가수들 좀 사 올 수 있겠어?'


헉, 가수를 산다니, 그건 뭔 소리인가?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대위가 설명을 해주었다. 오후 네다섯 시쯤 되면 낙원상가 주변으로 '딴따라 인력 시장'이 생기는데 그날 일거리를 찾는 오부리 연주자들이나 밤무대 가수들이 모이면 그중에서 군부대 공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여자 가수 두 명을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조건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전방부대 공연 6박 7일 12회로 일당으로 쳐서 당시 돈 하루 5만 원쯤을(액수는 정확하지 않은데 이 여성들이 업소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액수 였다.)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공연을 앞두고 각자 3박 4일간의 휴가를 받는데 이때 집에 가서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부대에서 입을 '사복'을 갖고 오고 자잘한 소품과 소모품도 사 오는 시간이었다. 나는 특별히 이틀을 더 부여받았고 내가 골라둔 여자 가수 두 명이 확정되면 정훈참모가 서울로 와서 계약을 하고 같이 부대로 복귀하는 것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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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이후로 우리는 이발을 하지 않아서 저마다 더벅머리에 전투복 상의를 꺼내 입고 다녀서 다른 사병들이 보기에는 백수건달처럼 보였을 텐데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우리를 보안대 소속 병사로 오해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가는 날 읍내에서 버스를 타기 전 모두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각자 자기 집이 있는 도시로 버스를 타는데 사회를 맡은 병장이 내게 한마디 했다.

"노래 실력은 다 비슷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으니까 야한 애로 골라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5박 6일 동안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지 않았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북한주민들 옷처럼 보이는 허름하고 낡아 보이는 남자옷과 여자 옷을 두벌씩 사야 했고, 소품으로 쓸 화약이 들어가는 권총과 화약 탄알 두 박스, 역시 소품으로 쓸 양주병 여러 개와 가짜 피와 상처를 만들 때 사용할 바셀린 로션과 식용 빨간 염료를 구입해야 했다.

전방으로 군대를 간 놈이 머리를 길러서 이상한 모습으로 난데없는 휴가를 나오자 모두들 반응이 재밌었다. 엄마는 혹시 내가 탈영한 게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고 (차마 집에다 문선대 공연 팀으로 차출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는 파란만장했던 지난 몇 주간 있었던 일에 뻥을 보태서 얘기했더니 엄청나게 신기하고 재미있어했다.


나는 혼자서는 겁이 나기도 하고 나보다 더 오래 DJ 생활을 했던 친구 형과 함께 낙원상가에 갔다. 점심을 먹고 예전에 일하던 다방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어슬렁어슬렁 나가봤는데 과연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기타나 바이올린, 트럼펫 등 악기 박스를 메거나 들고 온 사람들이 낙원동 떡가게 거리 맞은편 지하도 입구 주변으로 서성대고 있었다. 대부분 악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라 '딴따라'라는 티가 났지만 가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안 들고 온 사람들, 그중에 화장을 짙게 하거나 의상이 튀는 사람들이 가수였다.


친구형과 나는 낙원상가를 계속 빙빙 돌면서 '야하게' 생긴 여자들에게 군부대 공연을 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며 다녔는데 몇몇 악기 든 아저씨가 '문선대에서 왔냐'라고 아는 척을 했다. 그렇게 가수를 물색하던 중 한 여성이 자진해서 우리 쪽으로 와서 자기가 하고 싶다고 지원을 했다.

허탕 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러웠던 나는 반색을 했고 친구 형은 일 할 시간이 됐다고 먼저 자리를 떴다. 자기 이름을 '미미'라고 소개한 여성은 나와 같이 다른 여자 가수를 찾았는데 미미는 그러지 말고 자기가 아는 언니를 불러보겠다고 공중전화를 찾았다.

미미의 전화를 받고 나온 여성은 '티나'였는데 미미가 말한 대로 키가 늘씬하고 다리가 길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문선대나 군부대 경험이 없었다. 그게 어떤 건지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고 밤무대 가수 경력은 2년 이상이어서 어리숙한 가수는 아니었다. 나는 일단 두 사람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다음날쯤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에게 잘할 수 있다고 안심시키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훈참모는 나에게 가수들과 얘기할 때 내가 이등병이라고 얘기하지 말고 '하사'라고 얘기하라고 했는데 나는 아예 내 계급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오후에 미미와 티나를 만나서 정훈참모를 기다렸다.

만날 시간이 지났는데 정훈참모는 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부대로 전화를 했다.

부대는 전날 밤 수색대 병사가 작전을 나갔다가 지뢰를 밟는 사고가 나서 완전히 비상상황이었다.

보도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정훈참모와 정훈부 장병들은 모두 비상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하던 정훈부 연락병은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그냥 공연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왔다. 나도 김이 샜지만 미미와 티나 역시 낙담한 표정이었다. 오늘 밤 클럽에서 일할 것을 포기하고 기다리기만 했던 그들에게 미안해서 내 돈으로 저녁을 사주고 이틀 사이에 그래도 친해졌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중에 또 인연이 있으면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복귀하려고 아침에 준비를 하는데 부대에서 전화가 왔다. 공연 예정대로 진행할 테니 여자들 데리고 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고 곧바로 미미와 티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 점심이 지난 시간 사복을 입은 나와 미미, 티나는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원도 양구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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