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 중년 대학생에게 닥친 위기의 주말
마라톤 대회는 저마다 일정이 연중 어느 때인지 정해져 있고 올해 21회째인 경기 마라톤 대회는 그 일정을 올해 초부터 공지한 바 있지만 나는 내가 이번 학기에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난달쯤 동네 마라톤 클럽 회원들과 참가 신청을 해놓아 버렸다. 더군다나 이번 대회는 내가 그동안 참가했었던 10K 대회가 아니라 하프 코스인 21km를 달리는 대회이고 나로선 첫 장거리 대회 출전이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 편입학한 사이버 외국어 대학교 스페인어학부의 중간고사는 바로 마라톤 대회 전날 밤인 토요일 저녁 시간에 있었다. 사이버 대학교라는 특성 때문인지 정해진 시험시간에 모든 학생이 동시에 접속해서 시험 문제를 풀어야 하는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하는 시험이었다. 비대면으로 인터넷을 통해 중간고사 시험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하는 학교 측에서 아마도 부정행위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마련한 장치인 듯했다.
현직 교수인 나는 전날 내 학생들에게 중간고사를 치르게 했는데 바로 다음날에는 이제 학생 신분이 되어 시험 준비를 했는데 이번학기 세 과목을 수강하는 나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누가 내 성적을 보자는 사람은 없겠지만 가족과 지인들이 내가 큰 마음먹고 다시 학교에 입학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엉터리 점수를 받을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스페인어를 배운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기만 했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어서 스스로도 내 수준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두 과목 시험을 연달아 쳤는데 모르는 문제가 나오지 않았고 틀리게 썼다고 생각되는 문제도 없었다. 시험을 치기 전까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험이 만족스럽게 끝나니까 안도를 넘어서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보니 어서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다음날 8:20에 출발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면 대회장인 수원 종합운동장까지 늦어도 7:30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동네 마라톤 클럽에서 단체로 신청했기 때문에 배번과 기록측정용 센서와 기념품등을 행사 당일 현장에서 수령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회에서 입을 운동복과 러닝화, 갈아입을 옷 등을 챙기고 침대에 누우니 이번에는 정신이 말똥말똥 잠이 오질 않았다. 평소에 먹는 양보다 조금 센 수면제를 먹고 누웠지만 시험을 마친 흥분감과 내일 처음 뛰어보는 하프 코스의 대회 생각에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렇게 꼬박 동이 트는 새벽까지 누워서 뒤척였다.
정말로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6시에 일어났을 때는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경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일단 대회장까지는 가서 마라톤 클럽 회원들 얼굴이라도 보고 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택시를 타고 운동장까지 가려고 했지만 뛰지도 못할 대회에 택시 타고 급하게 갈 이유가 없었다. 마침 버스도 금방 오길래 올라탔다. 수원종합경기장을 가려면 한번 갈아타야 했는데 주말 이른 아침이어서 버스 안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수원역을 지나고 나니 꽤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 사람들의 복장이 대부분 마라톤에 나가는 옷차림이었고 일부는 배번호를 부착한 이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이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마라톤 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써브 3 가능하겠어?"
"오늘 날씨가 뛰기에 참 좋은데"
"코스에 오르막이 많으니까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겠어요"
스포츠 가방에 러닝화와 준비물들을 챙기고 모자와 스포츠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나도 그들 눈에는 같은 대회에 나가는 선수였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있으려니 슬그머니 묘한 전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뛸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뛰어보자'
종합운동장에 도착해 보니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준비 운동을 하는 사람들, 둘셋씩 모여 가볍게 뛰고 있는 사람들, 짝을 이루어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들. 내가 속한 동네 마라톤 클럽 부스에 가니 모두들 활기차고 명랑하게 몸을 풀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피곤하고 지친 표정을 버리고 함께 어울려 스트레칭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자꾸 입이 말라서 물을 많이 들이켰다.
출발 전 이런저런 행사가 있었지만 얼이 빠져서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옆 사람들을 따라서 국민의례를 하고 경품 추첨과 공무원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포성이 울렸다.
동네에서 같이 훈련을 할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 클럽 회원 두 사람을 따라서 뛰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기록용 스포츠 시계나 스마트 시계를 착용하고 달리면서 자신의 속도를 확인하는데 속도는 1km를 달리는 시간으로 표시된다. 5:30이라고 하면 1km를 5분 30초에 주파하는 속도라는 뜻인데 나중에 내 기록을 보니 초반에 나는 5:30대 속도로 이들과 달렸는데 평소 6:00대 속도인 나로서는 빠르게 달린 속도였다. 초반 5km를 정신없이 달렸는데 내가 무리 중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경기 코스가 유턴으로 돌아 나오는 구간이 있어서 나보다 빨리 달리는 선두그룹이 돌아 나와서 나를 패스 하는 걸 보며 내 앞에 어느 정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 나오면서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혼자서 21km를 뛰어보는 훈련을 세 차례 해봤는데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15km를 넘어서면 여지없이 오른쪽 무릎과 고관절에 통증이 극심해져서 속도가 현격하게 떨어지고 나중에는 멈춰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을 뛰어봤는데 늘 18km쯤에서 멈추고 걸어서 돌아왔다. 살다가 고관절에 통증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던 터라 나는 후반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리고 하프 코스의 컷오프 시간은 2시간 30분이었다. 즉 그 시간 안에 21km를 달리지 못하면 탈락하는 것이다. 마라톤을 위해 교통 통제를 하다가 2시간 30분이 넘으면 차량들이 자유롭게 다니니 더 뛰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게 된다. 이번 대회에서 내 목표는 2시간 30분인 컷 오프 전에 완주를 끝내는 것이었다.
중간에 급수대가 나오면 빠뜨리지 않고 물을 마셨다. 코와 입으로 숨을 쉬기 때문에 입이 말랐고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감이 몰려와 물을 보급해서 몸을 깨우려는 시도였다. 물에 적신 스펀지를 받아서 머리에 쥐어짰고 바나나나 초코파이는 먹지 않았다. 누가 달리다가 초코파이를 먹는지 궁금했다. 달리다가 그런 게 먹히나?
코스는 터널이 연이은 대로로 나 있어서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다. 10km쯤 지나면서 숨이 차고 힘이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계속 오른쪽 무릎과 고관절에 신경을 집중했다. 미드풋 착지를 하려고 애를 썼고 좁게 뛰어야 무릎 부상과 통증을 막을 수 있는 보폭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으나 이날 워낙 컨디션이 난조라 성큼성큼 뛰는 큰 보폭은 저절로 예방됐을 것이다. 15km 지점을 통과하기 전 아니나 다를까 무릎과 고관절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작은 통증이었지만 계속 달리는 중이라 시시각각 통증의 강도가 커졌다. 그동안 계속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던 6:00 페이스메이커들이 이 즈음부터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뛰다가 구급약을 들고뛰는 자원봉사자에게 스프레이 파스를 요청해서 뿌리며 달렸다.
걱정스러워하는 내 낯빛을 보더니 자원봉사자는 "잘 뛰고 계세요, 지금처럼만 계속 뛰시면 2시간 안으로 골인할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하고 말해 주었다. 마라톤을 뛰다 보면 응원을 하러 나온 선수의 가족들과 동호회 클럽 회원들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선수들이 달려오면 박수를 쳐주고 파이팅을 외쳐주는데 이것이 의외로 사람 기운을 북돋운다. 나를 향한 박수는 아니겠지만 교통이 통제되어서 걸어올 수밖에 없었을 텐데 거기까지 와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정성이 고맙고 지쳐가던 몸에 시원한 청량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경기 코스인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매섭고 살벌한 눈빛과도 맞서야 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운전자들로 모처럼의 휴일 이른 아침무터 마라톤 대회 때문에 도로가 통제되어 오도 가도 못하게 도로에 갇혀버린 나들이객들과 가족들로 달리는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살의마저 느껴진다. 통상 마라톤 경기가 펼쳐지는 도로에는 행사 몇 주 전부터 도로 통제를 알리는 일정과 우회도로에 대한 현수막이 걸리지만 이를 보지 못했거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시민들은 도로로 나섰다가 길게는 수십 분째 갇히는 곤욕을 지르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통제하는 경찰과 맞서 싸우거나 선수들을 향해 욕설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나 숨이 턱에 차고 무릎과 고관절의 통증을 참고 뛰는 나에게는 그저 휙 지나치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나는 내 경기를 감당하기에도 지칠 지경인 것이다.
15km부터 누적 거리를 알리는 표지가 나오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 6km 남았구나, 이제 3km만 뛰면 끝이다. 그러다가 멀리서 골인 지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기다리는 응원객들이 늘어난다.
"힘내세요!"
"파이팅"
"다 왔습니다, 이제 끝이에요!"
이런 외침과 박수를 들으면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우리 클럽 동료들은 대부분 나보다 먼저 골인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02:06:56
내 기록이었다. 두 시간 30분 안에만 들어오자던 내 계획과 한잠도 못 자고 일어나서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경기장에나 와보자고 한 인생 첫 하프 마라톤 경기를 완주한 것이다. 운영요원들에게서 완주 메달과 음료, 간식을 받아 들고 그늘에 주저앉았다. 지난 두 시간 동안 내가 뛴 건지, 달리는 꿈을 꾼 건지 정신이 몽롱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무릎과 고관절 통증은 달리기를 멈추자 귀신같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기에 참여했을 때 평소 기록보다 훨씬 좋은 기록이 나오는 것을 경험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대회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평소와 다른 코스, 안 달려본 길을 달리면서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수백, 수천 명이 함께 달리면서 생기는 묘한 흥분감이 평소와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동호회 부스에 도착하니 5km, 10km를 마친 회원들이 편육과 치킨 등 음식을 차려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좀 더 있으면 풀 코스 주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 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맡겨두었던 휴대폰과 짐을 찾아서 메시지를 확인하니 주일 예배를 마친 아내가 경기장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내와 만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평양냉면을 먹으며 첫 마라톤 하프코스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22년 만에 치른 중간고사와 그다음 날 이어진 첫 하프 코스 마라톤을 무사히 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