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토요일 아침, 게으르게 커피를 마시며 밀린 유튜브나 보려고 하던 차에 구글이 메시지를 보내온다.
매달 100기가바이트의 저장공간을 유료로 사용하고 있는데 사진이 늘어나서 공간이 부족하다는 내용.
결국 돈을 더 써서 저장공간을 늘리던지, 중요치 않은 사진 정리를 해서 공간을 확보하라는 말인 듯하다.
그래, 이 참에 사진을 좀 정리할까. 친히 데스크톱에 앉아 구글포토를 열어본다.
아하, 친절한 구글씨, 알아서 공간을 확보해 주려고 하는지 '저장공간 확보'라는 메뉴가 보인다. 안전한 곳에 사진을 백업해 주면서 내 공간을 확보해 주려는 모양이다. 선택을 했더니 한동안 내 사진을 지워내려 가는 듯한 화면이 나오면서 화면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는 안내까지 덧붙인다. 구글씨, 사랑합니다.
잠시 후 작업이 종료되더니 내 아이폰에 가서 사진앨범에 접속한 뒤 '최근 삭제된 항목'을 영구 삭제할 것을 안내한다. 구글의 노예인 나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휴대폰을 열어 구글이 폐기한 내 사진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 이렇게 한차례 하고 나니 공간이 많이 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글은 또 '저장공간확보'라는 메뉴를 띄워 아직도 내가 삭제해야 할 사진이 많다고 알려온다.
그래? 구글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나는 또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해서 또 한 번 휴대폰의 사진까지 영구 삭제한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것이 내가 오늘 아침에 저지른 만행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가족사진과 히말라야 트레킹 사진, 산티아고 순례 사진을 날려버렸다.
게다가 나중에 쓰려고 따로 폴더까지 만들어서 남겨 둔 지인들이 선물로 보내온 스타벅스 쿠폰 사진까지 모조리 날려버렸다.
이럴 땐 헐, 소리마저도 안 나온다. 허걱!
구글님을 팽개치고 네이버님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역시 네이버님은 이런 상황에 처한 선배님들의 고난 극복 사례를 사진과 더불어 차근차근 알려주시는 블로그 글들을 보여준다.
따라 해보려 했지만 아, 너무 스텝이 많다. 그리고 일괄복구 되는 게 아니라 집 zip 파일로 통째로 복원되면 촬영일과 촬영 지역이 마구 뒤섞인 폴더들을 일일이 열어서 살려내야 한다.
이게 무슨 주말 아침의 봉변이란 말인가.
삭제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진들을 열어보았다. 아직도 사진들은 산더미처럼 구글 클라우드에 내 아이폰 메모리에, 그리고 아이클라우드에 남아있었다. 나는 구글 클라우드를 100기가바이트 유료 이용 중이었고 내 아이폰의 저장공간 256기가바이트에도 상당량은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저장되어 있는 사진 중 오래된 것은 결혼하기 전 총각 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것들로 벌써 20년도 넘은 예전 사진들이고 대부분의 사진들은 결혼 이후의 행적들이다.
여행을 가거나 산에 올랐을 때, 중요한 행사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지만 산행 초기에는 천왕봉이나 대청봉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일출이라고 사진을 찍고 일몰이라고 사진을 찍고, 밥을 먹으며 찍고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었다.
중요한 자료가 나오면 사진을 찍어두었고, 기차표나 영화관 표는 혹시나 해서 또 사진으로 캡처를 해두었다. 그렇게 내 저장공간은 불필요하고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진들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20년 전 디지털카메라를 갖기 전에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었다.
필름 카메라로 식당에서 음식 사진을 찍거나 영화관 표를 찍어두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해외에 나가거나 멋진 풍광을 만나면 의례히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인화해서 앨범에 꽂힌 사진들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아서 창고 어딘가 구두 상자에 현상소에서 담아준 봉투째로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그 사진들을 꺼내 본 적이 없다.
예전 직장 생활을 할 때 5S 어쩌고 하는 '정리'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최근 수개월 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버려도 되는 물건이니 정리, 즉 버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교육에 따르면 내가 갖고 있는 수천수만 장의 디지털 사진들과 창고에 처박힌 옛날 사진들은 모두 정리 대상이다.
버려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버려야 마땅한 물건인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다시 남겨진 사진들을 들춰보았다.
모두 찍을 당시엔 이유가 있어서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정말 이 사진들이 필요한가를 스스로에게 되묻자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 어렸을 적 사진들은... 이 생각에 미치자 가족사진, 아이들 사진은 필요한 것 같았다.
정말? 누가 볼 건데? 언제 볼 건데?
아마 다시 본다면 내가 볼 것 같고, 언제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끝내 남은 사진들을 정리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일이라 귀찮기도 했고 급한 일은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 없이 모으고 있는 사진놀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봤다.
뭔가 그럴듯한 걸 봤을 때 이제는 무턱대고 휴대폰 카메라부터 꺼내 들고 보는 버릇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한다는 것은 다시 볼 필요 때문에 하는 것인데 다시 볼 기약이 없는 기록을 하느라 내 눈으로 제대로 보는 시간을 줄이거나 마음에 담는 시간을 생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제부터는 좋은 것, 소중한 것, 중요한 것이 내 목전에 나타났을 때 그까짓 휴대폰에 기록하기보다는 내 마음의 눈으로 잘 담아서 그걸 봤을 때의 내 느낌과 감상, 주변의 반응들을 질 기억 해 두기로 한다.
내 마음속에, 내 기억에 담아두면 주말 아침 봉변 당하듯 한 순간 날아갈 일도 없고 예전의 어떤 순간이 그리워진다면 눈을 지그시 감고 그때의 기억을 천천히 소환해 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아름다운 풍광을 내 눈처럼 잘 담아냈던 카메라는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