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여러 나라들은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언어에서 '본다'는 뜻에 해당하는 단어는 매우 많다.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발견한 여러 가지 신기한 문물 중 하나는 '동의어 사전'인 Thesaurus였는데 나를 괴롭히던 에세이 숙제를 할 때 필수적이었다. 단어를 찾으면 뜻을 풀이해 주는 사전과는 달리 해당 단어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단어와 예문, 사용법 등을 알려주던 동의어 사전에서 '보다'를 뜻하는 'see'를 찾아보면 본다라는 의미를 갖는 유사단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watch, observe, look, glance, glimpse, scan, distinguish, notice...
우리말은 또 어떤가.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말 표현에는 주시하다, 목격하다, 관람하다, 조망하다, 감독하다 등 많은 단어가 있고 노려보다, 우러러보다, 깔보다, 쳐다보다, 바라보다 등의 우리글 표현도 많다.
왜 이렇게 보는 것에 해당하는 동사가 많은 걸까? 보는 것은 우리 인생사에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영화를 전공하고 학생들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을 지도하고 있으니 보는 일은 내 직업과 꽤나 관련이 많은 편인데 예로부터 할리웃에서는 이런 영화판을 '쇼 비즈니스 show buisness'라고 불렀다.
영화를 비롯한 뮤지컬, 코미디, 음악 등 할리웃 연예계를 통틀어서 '보여주는 사업'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인간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곧바로 찾는 것이 바로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볼 만한 것'을 보여주는 쇼 비즈니스는 그래서 배고픔을 면한 인간들에게 '큰 낙'이 되었고 그걸 제대로 채워주면 '대박'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다'라는 행위는 일견 별 노력 없이 얻어지는 능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 또 뛸 줄 알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아기는 무수한 넘어짐과 반복적인 시도 끝에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성공하고 그제야 첫 발을 떼게 되는데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세상에 태어난 지 해를 넘겨야 제대로 할 줄 알게 된다.
반면에 보는 일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서 '저절로' 하게 된다. 태어나고 금방 눈을 뜨고 뭔가를 보지만 이때는 사물의 분간이 어렵고 칼라가 아닌 흑백으로만 어렴풋이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한두 달만 지나면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되고 눈앞에서 미소 짓는 엄마의 눈을 맞추며 빙그레 따라 웃기도 하는 것이다.
별다른 노력이나 되풀이되는 연습 없이 그저 덮여있는 눈꺼풀을 위로 들춰내기만 하는 동작으로 사물을 헤아리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분간한다. 태어나자마자 울어젖힌 '소리침'이나 숨차게 빨아 마신 '젖 먹는' 동작과 마찬가지로 학습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보는 것은 고도의 경험과 철학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로나 석학들은 우리 같은 장삼이사와 똑같은 세상을 보는데도 그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나 '혜안'을 보여주기도 하고, 셈이 빠르고 이재에 능한 이들은 어떤 종목을 골라야 돈을 부풀릴 수 있는 자신만의 '인사이트'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재빨리 파악하는 '선구안'을 갖고 있어야 하고 적령기의 청춘남녀는 상대가 나에게 최상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귀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너무 약삭빠른 도시에서 물정 모르고 순박한 청년은 '눈 뜬 장님'이 될 수도 있고 이런 모든 보는 행위를 하는 '눈'이 보배라며 우리는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공부하고 경험하는 청년기의 학습과정은 더 잘 보기 위한 것이거나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남보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귄한과 권력을 갖고자 하는 이유는 결국 더 많이 보기 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통령은 우리보다 볼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고 우리 학교 총장은 평교수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봐야 할 것이다. 애당초 '높은 자리'나 '고관대작'같은 표현은 그 단어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높은' 위치가 나타나 있기도 하다.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위정자, 권력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는다. 높이 올라야 멀리,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롯데 월드타워의 레지던스는 아마 초고가의 거주지일 텐데 한강변을 내려다보는 초고층 건물에서 아래를 조망하는 느낌은 아마도 권력자의 느낌과 유사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아낌없이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권력자의 시선을 구매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욕망'은 생각보다 크고 세다.
청년들은 여름방학을 바쳐서 일한 대가로 번 돈을 탈탈 털어서 '유럽 여행'을 가는데 사진으로만 보았던 에펠탑을 반드시 내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 어려운 시간들을 참아내게 한다.
평생을 일하고 은퇴한 직장인이 시간과 경제력에 여유가 생겼을 때 먼저 하는 일이나 평생의 버킷리스트라고 꼽는 것은 대부분 해외여행으로, 이 역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러 가는 일에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일이다.
그래서 끝내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 이들은 안타깝다. 황해도에서 월남한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고향 마을과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셨다.
마지막으로라도 부모 얼굴을 보기 위해 우리는 임종을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낯선 문명이 화상통화라는 것을 만들어 냈을 때 끊기고 번지는 화면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자식들과 손주들의 모습에 반색했던 것이다.
잘 봐야 잘 산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자주 보아야 좋은 것들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
불행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했거나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고, 그리고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친 사람들이다.
저절로 할 줄 알게 되는 '보는' 일을 '제대로' 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