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을 본 날.
오전 운동을 마치고 곧바로 영화관으로 출발하지 않고 탈의실에서 좀 쉬다가 갔다.
영화가 무려 189분의 러닝 타임을 갖고 있어서 네 시간 주차권을 주는 걸 감안한다면 상영시간에 맞추어서 가는 것이 상영 후 점심 식사를 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전 9:50에 시작한 영화는 1시가 훌쩍 넘어서 끝이 났다.
얼마 전 역시 세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의 아바타 2로 학습된 바 있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상영 후반부에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중년 남자의 슬픈 전립선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상영시간은 넷플릭스 등의 OTT의 공격에 시달리는 영화계 사정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듯했다.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토비 맥과이어가 출연하는 개봉 이틀차 할리우드 영화를 8개관을 가진 CGV 동탄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영화관에서만 상영 중이었고, 조조 상영 시간에 나는 네다섯 명의 다른 관객과 함께 쾌적한 환경에서 관람했다.
사전정보 없이 예매한 이 영화를 보고있자니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래 살다 보니 이제 할리우드에서 나를 위한 영화를 만들기도 하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판 이야기였다.
시기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의 무성영화, 유성영화 변환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영화를 만드는 카메라 뒤의 프로듀서와 배우, 영화 언론이 주요 대상이었다.
제목을 <바빌론>이라고 지어서 찬란한 제국으로 할리우드를 비유했으나 영화에서는 아무도 할리우드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벗어나서야 간신히 행복의 끄트머리를 붙들 수 있었고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자살 등으로 불행한 엔딩을 맞고 만다.
잭 콘래드의 자살은 영화 중간부터 예측할 수 있었는데 막상 그의 자살 장면이 정말로 묘사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수많은 배우들이 떠올랐다.
배우들은 자살을 많이 한다.
감독들도 자살을 많이 한다.
아까운 사람들이 많이 자살했다.
그들은 모두 잭 콘래드였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나서 새로운 매체 영화에 혼신을 다 바쳤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돈과 명예가 같이 따라왔다.
그렇게 정점을 찍은 배우와 감독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한때 영화감독이 되려고 했었는데 결국 되지는 못했다.
감독은 못되었지만 감독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의 말년은 좋지 못하다.
행복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관객들은 감독과 배우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환호했다가 기대했던 걸 주지 못하는 순간 야멸차게 떠나버린다.
새로운 감독과 배우는 눈길만 돌리면 늘 대기 중이니까.
내가 감독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누구보다도 멋진 작품을 만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불행한 여생을 보내거나 자살했을 것 같다.
이 슬픈 영화를 세 시간이 넘도록 보고 돌아와 자료를 보니 이미 개봉한 북미에서는 흥행이 부진한 걸로 나온다.
놀랍지 않다.
아바타 2와 같은 시즌에 나온 것 말고도 흥행에 성공적이지 못할 요소들이 여럿 있다.
그래서 더 슬펐다.
나도 영화의 후반부 장면같이 내가 영화를 만든다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샌프란시스코를 아내와 방문한 적이 있다.
학교에 들러 세트장이 있는 건물과 수업을 하던 영화관과 기자재 실과 후반 작업실이 있던 곳들을 가보았는데 예전과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저기서 악을 쓰고, 저기서 울고, 저기서 배우에게 연기지도를 했었는데...
이런 영화를 일반 관객이 보면 어떤 감흥이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감흥 이전에 지루해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