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서울 청년 킴을 찾아서
이번 카미노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순례 도중 한국인 순례자들과의 만남이 드물었다. 처음 카미노를 출발한 지점이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피레네 산 능선의 프랑스 스페인 국경 마을인 솜포르트(Somport) 였다는 것도 이유가 됐을 테고 이어지는 아라곤 길(El Camino de Aragon por Frances)이 순례자들 사이에서도 걷는 이의 숫자가 꽤나 적은 한적한 길이라는 것도 한국인이나 다른 순례자들을 만나기 어렵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길에 들어왔는데도 한국인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잔에게서 '곤경에 처한 킴'에 대한 얘기를 들은 후 나는 한국인을 찾아보려 주의를 기울였지만 보통 해가 뜨기 훨씬 전인 5시경에 출발하는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8시는 넘겨야 드문드문 있었고 그나마 대부분 나이 많은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말했다.
"너도 한국에서 왔구나. 한국인들을 꽤나 자주 본다."
"나 어제 한국 순례자들과 같이 걸었는데, 너도 그 친구들 알지?"
"스페인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줄은 몰랐어. 왜 그런 거야?"
나에게만 눈에 띄지 않는 한국인, 천천히 걸으면 만나질까? 카페에서 좀 오래 앉아 있어 볼까? 그러다가 한 중국 식당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났다. 보기 드문 중국 식당이고 유튜브에서도 맛있다고 얘기가 도는 식당이라 근처 알베르게에 체크인한 후 점심 무렵 중국식 순례자 정식 식사를 하러 들어갔는데 마침 한 한국인 순례자도 볶음밥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킴이세요?"
"네?"
"휴대폰 잃어버리지 않으셨어요?"라고 서둘러 묻는 내 눈에 그가 막 휴대폰으로 세 살짜리 딸과 카톡을 마무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휴대폰이 멀쩡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음에 적잖이 실망한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까지 가는지와 같은 통상적인 카미노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아, 그 상욱이 말씀하시는 거죠. 걔네들 지금 몇 마을 전쯤 걷고 있을 거예요."
젊은 아빠 순례자는 며칠 전 '킴' 혹은 상욱을 만났고 그들 무리는 출발을 늦게 하는 편이라 지금 한 두 마을 전에 있을 것이라는 얘기와 킴은 이제 다른 한국인 청년 서넛과 함께 걷고 있어서 휴대폰 없이 걷는 불편함은 아마도 해결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젊은 아빠는 카미노를 출발할 무렵 갑작스럽게 대학원을 다니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에 취업이 돼서 부르고스(Burgos)까지만 걷고 귀국해야 한다고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걷고 돌아가고 싶다는 그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이제 '킴'이 가시권 내에 있음을 확인하게 돼서 그와 언제쯤 만나게 될까 기대하게 되었다.
나는 곤경에 처한 킴을 돕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진 수잔 모녀의 기품 있고 고상한 모습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킴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킴을 도왔다는 소식을 수잔 모녀에게 들려주며 그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더 앞섰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뭔가 어려운 일을 해내고 그걸 뽐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나는 수잔 모녀와 다시 만났을 때 그들에게 뭔가 자랑할만한 일을 했다는 걸 보여주고 칭찬 듣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킴은 보이지 않았다. 만나는 한국인마다 '혹시 킴 이세요?'하고 묻고 다녔더니 이제 나를 다시 만나는 한국인들은 "아직도 상욱이 못 만나셨어요?"하고 되묻는 상황이 되었다. 그 사이 수잔 모녀와 길에서 몇 차례 마주쳐서 나는 마치 숙제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학생처럼 "아직도 킴은 못 만나고 킴을 아는 한국인들만 만났는데 그를 만나면 반드시 챙겨주겠다"는 얘기를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그렇게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부르고스는 큰 도시답게 사람으로 넘쳤고 화려한 대성당은 다시 봐도 놀랍도록 아름답고 위풍당당했다. 부르고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웬만한 순례자들은 다 이곳을 숙박지로 정했다. 일찌감치 도착한 나는 자리를 배정받은 뒤 정비 시간을 갖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다. 딱히 같이 점심 식사를 할 사람도 없고 10년 만에 찾은 아름다운 도시를 홀로 느긋하게 즐기고 싶기도 해서 성당 앞 광장에서 바가지요금의 정식을 혼자서 천천히 먹었다. 식사 후에는 한낮의 뙤약볕을 받으며 광채를 빛내듯이 서있는 대성당을 천천히 둘러보며 그늘이 나오면 한참을 들어앉아 성당 외벽의 고블린과 화려한 장식들을 홀린 듯 구경했다.
서둘러 출발했던 젊은 아빠는 성당 근처에서 순례 친구인듯한 외국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수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부르고스 중심가 구경과 성당 구경을 마치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알베르게 근처 한국 라면을 파는 동양마켓에 들러 신라면을 사고 스페인 이마트 디아에도 들러서 과일과 빵 등 간식도 사왔다.
햇볕이 좋아서 널어놓은 빨래가 금방 말랐다. 부르고스 알베르게에는 빨래를 널수 있는 중정이 있었고 복도에는 순례자들이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 있었다. 걷어온 빨래를 벤치에 앉아서 접고 있을 때 한국인 청년 무리가 중정에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 아빠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며 옆에 선 친구를 가리켰다.
"선생님, 얘가 상욱이예요!"
킴은 훤칠한 키에 체격도 건장해서 마치 운동 선수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내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 나를 만나자 수줍고 면구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제야 킴이 처했을 상황을 떠올려보았는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면 당장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방안이 술술 나왔을 테지만 여기는 이역만리 스페인 땅이 아니던가. 그가 예약한 항공권과 환전과 출금을 위해 준비해 두었을 신용카드도 휴대폰과 연동되어 있을 테고 가족과 연락을 하려면, 그리고 다음 마을까지 걸을 지도와 필수 정보들도, 이해할 수 없는 스페인어가 나왔을 때 척척 번역해 주는 구글 번역기를 돌리려고 해도 휴대폰이 없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휴대폰을 킴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축제의 혼란스러움을 틈 탄 나쁜 사람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성급하고 진중하지 못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멘붕이 되어버리고 이성을 잃었을 것이고 기분이 잡쳐서 순례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집어타고 돌아와 버렸을 것 같았다.
22세 청년 킴은 나 같지 않았다. 수줍게 내게 인사를 하더니 괜찮냐고 묻는 나에게 인파가 몰리는 광장에서 유럽과 외국이 초행인 자기가 부주의했고 이제는 다 잊고 그냥 걷고 있다고 괜찮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선 청년들을 소개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일행도 생겨서 가족에게 걱정하지 않도록 연락도 했고 함께 다니니 어려운 일도 없어서 애초에 정한 일정에 맞게 순례를 마치고 돌아갈 것이라고 차근차근 대답했다. 위기에 처한 킴에게 뭔가 도움을 주거나 그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어서 업적을 만들어야 했던 나는 머쓱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고 문제없다니 다행이네요."
다음날부터의 순례 여정은 일명 '메세타'라고 하는 고도 800미터 이상의 스페인 북부 고원을 수백 킬로 걸어야 하는 지루하고 따분한 길로 호불호가 갈리는 구간이었다. 그늘이 별로 없는 들판을 걷는 여정이라 언덕이나 산을 넘는 것보다 난이도는 쉬운 편이지만 해가 뜬 이후에 걸으려면 기온이 너무 올라서 지치기 쉽고 풍경도 비슷한 풍경이 계속돼서 이 구간을 버스로 건너뛰는 순례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넓게 펼쳐진 평원을 걸으며 명상에 잠길 수도 있고 길이 쉬워서 걷는 데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므로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기에 좋다고 이 구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새벽 시간에 일어나서 걷기를 시작해 햇볕 속에 걷는 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걸었고 그래서 알베르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편이었다. 부르고스에서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아서 카톡으로 연락이 가능해진 뒤에 오고 있는 한국 청년들을 위해서 내가 멈춘 마을까지 올 것인지를 묻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침대를 예약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같은 숙소에서 자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관찰한 이들 한국 청년 네 명은 모두 20대 초중반이었는데 네 사람이 처음부터 일행은 아니었다. 종규와 규성 두 사람만 한국에서부터 의기투합해서 같이 온 동네 친구 사이고 나머지 한 사람 경원은 프랑스길 출발지인 생장에서 우연히 만나 일정이 맞아서 같이 동행하기로 했고 나머지 한 사람이 도움을 구하고 있던 김상욱이었다. 한국에서 같이 온 친구 사이 두 사람 말고는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 서로 매우 깍듯했다. 그렇다고 서먹한 관계도 아닌 이들은 친하긴 한데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데에도 어색하지 않은 나로선 매우 흥미로운 관계로 보였다.
내 세대의 한국인끼리의 사람 사귀기 과정에는 일반적이라고 할수있는 '몇 년 생'인지 '몇 학번'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이들에게도 생략되지는 않아서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는 서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확인만 했을 뿐 곧바로 연장자가 말을 놓고 어린사람이 동생이 되는 식으로 우리세대를 따라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는 나이많은 사람이 아래사람을 보호하고 밥값을 내주는 의무감이나 아래사람은 위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거나 기다리는 예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필요 이상의 신상을 묻거나 알리는 일도 없어서 이미 서로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이인데도 사생활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려준 부분만 알고 있었다.
이들 청년들끼리는 나이가 많아도 서로 존대하고 같이 놀고 싶을 때는 의사를 먼저 묻고, 함께 어울리다가도 빠지고 싶거나 쉬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의사를 밝히고 원하는 방식으로 '따로 또 같이'가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식사 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각자 지갑을 열어 자기가 먹은 식대와 음료를 계산하고 이런 방식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서 나는 젊은 친구들과의 식사나 커피 한잔에 계산을 해야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내가 한두번쯤은 나이먹은 사람의 책임을 해보이려고 그들 몫을 지불하려고 했는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며칠 같이 지냈다고 아들뻘인 그들에게 편하게 말을 하거나 연장자의 특혜를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런 관계가 나도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