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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과 카미노에서 만난 우리 청춘들

20대에 산티아고를 선택했다는 것

by 이프로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나 스스로도 그렇고 지인들도 내가 청년들의 관심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카미노에서 한국 청년들을 대해보면 가까이에서 지낸다고 그들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일까. 그들 부모 세대인 중년의 시선으로 청춘들을 바라보면 자격증과 유학과 토익 등 청춘의 낭만을 즐기기보다는 오로지 관심은 '취업'과 '성공'에 몰두한 한쪽 극단과 다른 한쪽은 실의에 빠져서 '헬조선'을 외치며 노후준비도 안된 부모의 군더더기 짐으로 눌러앉은 모습이었다.


이들은 30대가 되면서 머리가 굵어져도 책임감 있는 사회구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YOLO를 외치며 자유분방한 혼전동거나 출산 대신 반려동물을 택하는 등 기성세대와 대립하며 극단적인 개인주의 성향으로 자신의 국가나 학교, 사회 등에 나 몰라라 식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먼 유럽 땅에서 각자의 배낭을 메고 장거리 도보순례를 하는 동등한 입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교실에서 마주치고 연구실에서 상담하던 내가 알던 그들과 달랐다. 순례를 여러 번 하면서 '까친연'이나 여타의 카미노 카페에서 게시글과 댓글을 통해서 만나는 중장년 층과도 카미노를 대하는 생각이 달랐다. 내가 며칠 동안 특별히 가깝게 지낸 네 명의 한국 청년들을 비롯해서 길에서 만난 다양한 청년들은 튼튼하고 강인한 육체만큼이나 심성이 곧고 바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우선 자발적으로 800km 여정의 순례를 나섰으며 내가 만난 청년들은 하나같이 카미노 순례 비용을 스스로 마련해서 왔다. 한국 청년들은 대개 대학생이거나 직장을 다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사이에 짬을 내서 온 경우가 많았는데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카미노 800km를 걷는 도보여행의 경비를 부모에게 받아 온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유럽 청년들의 경우라면 짧은 비행시간의 저가 항공편으로 스페인을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으니 부담이 훨씬 덜했겠지만 한국 청년들의 경우 열두 시간에서 경유편의 경우 스무 시간도 넘는 비행시간에 비싼 항공권과 한 달 이상을 비워야 하는 일정을 만들려면 꽤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매우 큰 프로젝트였고, 따라서 결단이 필요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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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나 가족 여행으로 패키지 여행으로 유럽 곳곳을 다녀 본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은 대개 첫 유럽 여행인 경우가 많았고 그런데도 중장년 카미노 여행자들처럼 불안해하거나 갖가지 정보를 사전에 알아보고 예약까지 하고 온 바람에 오히려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킴은 이런 청년들 중 한 명이었는데 군 전역 후 복학하기 전까지 교보문고에서 알바 사원으로 일을 해서 벌은 돈으로 스페인을 찾았다. 생애 첫 배낭과 등산화를 자기가 번 돈으로 사서 매장에 진열된 산티아고 책을 마주하면서 흥미를 갖게 됐다고 한다. 부모님이 결혼을 늦게 하셔서 아버지가 58 개띠 생이라며 고생하시는 부모님 부담을 덜기 위해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아서 일부 충당하고 자신의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았던 킴은 늘 조용히 웃고 있긴 했지만 말수가 적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유럽 여행이 처음이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된 것도 처음인 킴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팜플로나의 산페르민 축제에 엉겁결에 휩쓸려 들어갔고 새로 만난 친구들과 악수하고 시끄러운 거리에서 몇 마디 주고받느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전역 후 새로 마련한 거의 신품 수준의 휴대폰을 도둑맞은 것이었다.


킴이 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의 '직진본능'이었다.

카미노에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그날의 순례를 마치고 나면 비슷한 일과가 이어진다.

샤워하고 빨래하고 시원한 그늘에서 한숨 자고 일어나 마을 구경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킴도 이런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모두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고국에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 사진도 보내주고 메시지도 주고받는 시간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론세Gronze나 카미노 앱에 접속해서 내일 갈 길을 알아보고 알베르게 예약도 하는 일과가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모두들 자기 침대에 누워 휴대폰 삼매경에 빠졌을 때 킴은 아직도 한참 해가 남은 하루가 길고 아까웠다.

그는 좀 더 걷고 싶어 했다. 결국 걷기를 멈추면 씻고 자는 일상만 남은 하루를 점심때 시작하는 건 그의 팔팔한 육신과 무료함을 피하고자 하는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킴은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고 그날 어디서 멈출지 생각 없이 떠난 일행들이 지치고 힘든 오후에 만난 마을에서 오늘은 이쯤에서 멈출까를 물을 때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작은 소리로 '난 좀 더 가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려다가 모두의 표정을 읽고 나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따라서 그날의 일정을 힘께 마감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던 것이다.


레온에 도착하기 며칠 전 마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20여 km를 걸은 그날은 무척 더웠고 바르에서 콜라를 한잔 마신 청년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주변에 알베르게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오늘 이쯤에서 마치자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시간이 아직 일러서 10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가도 충분할 것 같았다. 아쉬워하는 킴에게 '우리는 다음 마을까지 갈까요?' 했더니 반색을 하고 나를 따라서 일어섰다. 우리가 배낭을 다시 메고 일어서자 늘어졌던 나머지 청년들도 따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킴과 나란히 걸으며 나는 킴에게 레온 Leon에서부터 북쪽으로 빠져나와 오비에도 Oviedo까지 칸타브리아 산맥을 종단하는 '살바도르 길'Camino del San Salvador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산악지형이고 힘은 좀 들겠지만 무척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길이고 사나흘 걸려서 걷고 오비에도에서 다시 레온으로 돌아와 나머지 프랑스길을 걷는 일정도 그의 귀국 일정과 깔맞춤으로 들어맞았다.


'저도 살바도르 길 걸을래요.'

상욱은 기쁜 모습으로 나에게 대답했다. 나머지 청년들에게도 살바도르 길을 설명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고 먼저 도착한 일행이 피니스테레에 다녀온 후에 우리가 산티아고에 도착할 테니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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