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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에서의 망중한

by 이프로

길은 좋은 스승이 되기도 하고 치료가 두려워 두고 보기만 한 상처를 낫게 하는 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벽길에서는 추위와 어둠, 외로움과 두려움도 있지만 그 적막을 깨고 저벅저벅 걷다가 고개 들어 마주하는 황홀한 여명과 어느덧 환해진 사위는 참고 견딘 시간의 보상과 축복 같다.

밝아진 새벽녘의 경쾌한 새소리는 오늘 펼쳐질 일과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고 소리 없이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 속에는 이제껏 모르고 있던 들꽃 향기를 발견하게 된다.

한낮의 뙤약볕 쏟아지는 들판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내 노력을 가상히 여기며 도시에서 얻은 내상과 트라우마를 그늘에서의 달콤한 휴식으로 치료한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은 한 스승 아래서 공부한 동문들처럼 금방 친해지고 스스럼 없어진다.

내가 걸었던 오늘 아침의 가파른 언덕길을 저 사람도 똑같이 걸었겠구나, 비가 그쳐 뒤집어쓰고 있던 우의를 벗으며 뒤돌아본 들판에 우연처럼 펼쳐진 무지개를 저 사람도 봤을 거야.

말이 통하지 않아도, 혹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길을 비슷한 시간대에 걸은 사람끼리의 연대감이 있다. 서로를 챙겨주고 뒤에 올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런 길에서 만난 4인방과 의기투합하여 레온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빌려 2박을 하기로 했다. 다섯 명이 사용해야 하니 큼지막한 독채를 빌리기로 했는데 위치를 레온 중심가로 정하고 숙소를 찾으니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았다. 결국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있는 숙소로 정했다.


며칠을 함께 걷고 함께 잔 네 명의 청년들과는 이제 간단한 개인 신상도 알게 되었는데 유난히 붙임성이 좋고 예의도 발랐던 종규 씨는 세상에...! 우리 학교 재학생으로 나와 친한 동료 교수의 지도학생이었다. 서로의 신상 파악이 되는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다. 종규 씨는 내가 아끼는 학생과 교양과목을 같이 수강한 인연으로 우리 전공 프로젝트에 도움을 준 경험도 있어서 마치 내 학생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는 요리에도 능해서 레온에 도착하면 한국 식재료를 구해서 김치찌개도 끓여 먹고 삼겹살도 구워 먹자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 모두 레온을 향한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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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청년들과는 별도로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낮의 더위와 햇볕이 익숙해져서 함께 걸어도 좋았지만 한국에서도 늘 5시가 넘으면 기상하던 버릇이 있어서 서늘한 새벽 공기 마시며 먼저 길을 나섰다가 오후에 청년들을 숙소에서 만나곤 했다. 레온에 도착하는 날 새벽 10km쯤 걸었을 무렵 일본인 사또 상을 만났다. 인사를 하고 함께 걷다가 날이 따뜻해져서 그와 나는 잠시 배낭을 내리고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 넣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걸었는데 레온에서 하루 쉬었다 가시지 그러세요?"

"안 그래도 그럴까 망설이고 있었어요."


사또 상은 40년이 넘도록 일본의 적십자 사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한 백발이 잘 어울리는 60대 남성인데 혼자서 걷다가 손자 같은 한국 청년 4인방들과도 친해져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붙임성 좋은 한국 청년들은 배낭을 처음 메어 본다는 사또 상의 잘못된 배낭끈을 조절해 주었고 그가 메고 온 오스프리 배낭의 등판 토르소가 그의 체격에 맞지 않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제대로 고쳐주기도 했다. 한국 청년들도 트레킹 초보자여서 서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즉석에서 문제점을 검색하고 동영상 해결방안을 찾아내서 뚝딱하고 해결해 주었으니 사또 상이 보기에는 '해결사' 한국 청년들이었다. 다만 사또 상의 영어가 제한적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의 대화로 애틋한 속내와 감사를 표시했다.


그에게 우리가 빌린 숙소를 얘기하며 원한다면 청년들에게 물어볼 테니 함께 묵을 생각이 있냐고 했더니 반색을 한다. 청년들에게 카톡으로 사또 상의 합류가 가능한지 물어보니 모두들 좋다고 한다. 이제 일행은 여섯 명이 되었다. 레온에 점심시간도 안돼서 도착한 우리가 먼저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연락을 해서 체크인을 했다. 청년들은 어디쯤을 오고 있을까 연락해 보니 이들은 오다가 만난 강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보내온 물속에 풍덩 뛰어들어가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니 웃음도 나오고 정말 제대로 카미노를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왜 나는 그동안 더운 여름날의 카미노를 땡볕을 걷다가 만난 시원한 강물에 들어가 볼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걸까? 천천히 신나게 놀다 오라고 하고 사또 상과 나는 점심을 먹으러 거리로 나갔다.


청년들이 도착한 이후로 우리의 짧은 축제는 시작됐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슈퍼마켓팀과 동양마켓으로 시장을 봐와서 현란한 조리와 저녁 식사 세팅으로 이어졌다. 제육볶음, 김치찌개, 안동찜닭, 감자조림, 신라면, 소시지와 계란, 베이컨 조식 등이 우리가 2박 3일간 레온에 머물면서 해먹은 음식들이다. 사또 상은 자신을 위해 침대를 내어주고 거실 소파에서 자는 청년들을 위해 대용량 와인을 사주었고 레온에 거주하고 있는 어른들의 산티아고 카페의 여성 회원은 담날 오전에 짧은 레온 시내 관광 가이드도 해주시면서 맛있는 스페인 복숭아를 한 아름 사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잔치가 끝났다.

이틀을 자고 난 뒤 맞은 새벽 나와 킴이 가장 먼저 일어나 출발 준비를 했고 곧이어 일어난 사또 상과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모두 잠 속에 빠져있던 한국인 청년 세명과는 지난밤에 작별 인사를 미리 해두었다.


가로등이 길을 밝히고 있는 새벽 시간 킴과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레온 시내를 빠져나오다가 프랑스길을 버리고 북쪽 방향으로 갈라지는 살바도르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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