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미노 델 살바도르 1

분위기 파악

by 이프로

프랑스길의 레온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북부 도시 오비에도 Oviedo에서 끝이 나는 살바도르 Camino del Salvador 길은 총 구간 거리는 120km에 불과하나 칸타브리아 산맥을 종단하는 코스여서 순례 일정은 4-7일 정도로 제안하고 있다. 이 길의 종착지는 기독교의 주요 성물, 보물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오비에도 대성당이지만 내친김에 프리미티보길로 이어서 산티아고로 순례를 마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불과 몇 년 전에 북쪽길과 프리미티보 길을 이미 걸었던 터라 마음이 많이 끌리지는 않았다. 프리미티보 길의 아름다운 풍광을 다시 보면 반갑기는 하겠지만 그러자면 나에게는 하루가 모자랐고 순례 후반부를 그렇게 다그치며 걷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오비에도에서 다시 레온으로 돌아와 쉽고 쾌적한 프랑스길로 산티아고로 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킴도 나의 이런 제안에 동의했고 다만 젊고 빠른 그는 아마도 레온 도착 이후 속도를 내어 산티아고로 걷고 싶어 했으므로 귀국 항공일에 맞추어 세월아 네월아 걸을 예정인 나와는 잠시 작별을 해야 할 것이다.


첫날 새벽 호젓하게 나와 단둘이 걷게 된 킴은 줄곧 평지를 느리게 걷다가 산으로 들어가는 코스라는 것과 한번 걷기 시작하면 짧은 휴식 한두 번으로 그날의 종착지까지 내리 걷는 나와 스타일이 비슷해서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같이 걷던 세명의 청년들과 킴 모두 체격이 날렵하고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짱들이었는데 세명의 청년들이 근력운동 위주의 무거운 체격인데 반해 축구를 즐기는 킴은 전성기 때의 차두리처럼 빠르고 지칠 줄 몰랐다.

IMG_1430.HEIC

살바도르 길은 노란 화살표시가 잘 되어 있었다. 그냥 화살표시가 아니라 제대로 만든 팻말과 거리표시가 적절한 거리마다 세워져 있어서 해가 뜰 무렵에는 산속을 걷고 있던 우리는 길을 헤매거나 헷갈리는 일이 없었다. 한적한 산길을 걷고 있으면 가끔씩 사륜구동 SUV가 사냥개를 싣고 우리를 지나쳤는데 새벽녘에 길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토끼들과 이따금씩 길로 튀어나와 소스라치게 다시 사라지는 사슴들이 타깃인 모양이었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들리던 총소리에 설마 유탄이 우리에게 날아오지는 않겠지 하며 재빠르게 사냥 지역을 지나쳤다.


첫날 코스인 레온에서 라 로블라La Robla 27km 구간은 산길이 많고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전형적인 산악 구간에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했다. 고도가 1,000m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레온이 800m 고원 지역이어서 고도차가 큰 편은 아니었다. 로블라는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이 일요일인데도 문을 연 카페와 바르가 세 군데쯤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두 번째이고 스페인 할아버지가 걸어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행색으로 알베르게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호스피탈레라는 이따가 올 테니 먼저 씻고 자리를 잡고 쉬라고 일러주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우리는 몸을 씻은 후 마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일요일 오후 낮술을 즐기고 있는 주민들은 동양 남자 두 명인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카미노 길에 있는 마을인데도 낯선 외지인이 드문 모양이었다. 카페 한 두 군데를 들어가 봤지만 음식은 술안주 위주만 제공하고 있어서 카페는 패쓰하고 고맙게도 문을 열고 있는 디아에서 점심 먹거리와 음료를 사 와서 알베르게에서 먹었다. 적당한 식사거리는 저녁때 라고 달라지지 않아서 저녁 역시 슈퍼에서 사 온 냉동 피자를 데워먹는 것으로 때웠다.


이른 저녁 시간이 되자 10여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도착해서 알베르게의 1층 침상은 대부분 차게 되었는데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스페인 사람들이었고 이들 중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들 중 5명쯤은 부부 같아 보이는 중년 팀이었는데 이날은 몰랐지만 나머지 스페인 사람들에게 비호감을 샀는지 모든 이들은 이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한 코스 이상씩을 더 걷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신상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준 이는 발렌티나라는 30대 후반쯤으로 살바도르 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며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은 스페인 여성이다.


저녁 시간 느지막이 당도한 호스피탈레라는 당연하게도 스페인어로만 체크인 수속과 무언가 중요한 듯싶어 보이는 정보를 빠르고 사무적으로 일러주고는 자리를 떠났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술렁이기 시작했다. 킴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누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디스꿀뻬, 아블라스 잉글레스?'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를 외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보 구걸을 했다.


발렌티나는 달리기와 등산으로 다부진 골격과 키가 크고 늘씬한 몸을 가진 여성인데 살바도르 길은 처음이지만 산악 지형의 경험이 많아 보였다. 바스크 지방 출신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안경사로 근무하고 있는 중인데 휴일이 적고 근무시간이 길어서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고 최근에는 남친과의 일 때문에 상심하고 있는 듯했다. 발렌티나가 전해준 정보는 앞으로 이삼일 동안 걷다가 묵게 되는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는 식당이 없고 알베르게 역시 손님이 있는 경우에만 영업을 하는 식이어서 도착 하루, 이틀 전에 전화로 인원수를 알리고 식사를 미리 예약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도착한 알베르게 곳곳에는 다음 지역의 알베르게 전화번호와 꼭 예약을 할 것을 당부하는 '경고' 문구가 크게 써 붙어 있었다. 일부 순례자들이 예약 없이 도착해서 민가를 두드리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등 대민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 달라는 당부가 '지시사항'처럼 여기저기 게시판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영어 소통이 가능한 발렌티나에게 찰싹 달라붙은 우리는 그녀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일정에 한국인 두 명의 숙박과 식사를 예약하는 전화 통화를 듣고서 그녀에게 쌍 엄지 척을 날리며 '에레스 앙헬!' (넌 천사야!)을 외쳐주었다.

IMG_1463.HEIC
IMG_1443.HEIC 살바도르 길의 일정 예시
IMG_1444.jpg 폴라두라, 파하레스, 야노스데 소메론, 벤두에뇨스 마을에는 하루 전에 미리 식사를 예약해야만 한다.
IMG_1445.HEIC 파하레스 마을에서 밥 먹으려면 전화 예약을 하라고 알리는 메모

다음날도 역시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출발한 우리는 산을 두어 개 넘어 도착한 부이사 마을에서 예상과 다르게 부지런히 아침에 문을 연 카페를 발견했다. 빈속에 땀 흘리며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화장실도 급했고 카페인도 아쉬웠는데 작은 시골 마을에 문을 연 카페는 구수한 커피 향의 카페콘레체와 인심 좋은 또르띠야와 바게트를 내주었다. 확실히 아침을 제대로 먹고 커피를 마시면 몸이 부스트 업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쌩쌩해진 우리는 가팔라지는 산길을 향해 내달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레온에서의 망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