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울하프마라톤
올봄에 있었던 동아마라톤 이후 다시 찾은 광화문 광장.
새벽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 경기도에서부터 달리기 복장을 한 사람들이 타길래 이른 시간에 운동하러 가나보다 했더니 모두 나와 같은 '서하마' 참가자들이었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서울 하프마라톤은 인기가 높아서 접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감이 되어버렸다. 불과 수년만에 마라톤이 국민운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전통과 명성이 높은 동아일보사의 서울 마라톤, JTBC의 서울 마라톤, 조선일보사의 춘천 마라톤 역시 접수가 달리기보다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 되었다. 각각의 코스도 인기가 좋아서 서울 도심과 한강을 건너 강남을 달리는 매력과 춘천 호반을 달리는 짜릿함에 사람들은 홀린 듯이 모바일 접수에 달려들어서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준비한 훈련 결과를 시험해 볼 대회에 참가가 어렵게 되었다.
서울에 들어서기 전 다소 한산했던 새벽 시간의 1호선 지하철 안에서 나는 간식으로 가져온 떡을 먹고 아침의 낮은 기온 탓에 겉에 입었던 긴바지 트레이닝복과 러닝 재킷을 벗어서 대회 복장으로 변신했다. 미리 잘라 온 스포츠테이프로 양쪽 무릎에 테이핑을 마치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러닝 전용 양말로 갈아 신었다. 물도 충분히 마셔두고 입고 있는 러닝 쇼츠의 뒤춤 지퍼 주머니에는 에너지 젤 두 개와 염정을 챙겼다.
눈을 감고 오늘의 러닝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았다. 오늘 서하마는 하프 코스와 10K 코스가 있는데 초반 5km는 코스가 겹치기는 하지만 하프가 먼저 출발하기 때문에 선수들이 섞일 가능성은 적었다. 광화문에서 덕수궁을 지나 굴레방 다리 근처로 뛰고 마포대교를 건너서 여의도를 달리다가 양화대교를 건너 망원동을 지나 마포구청 월드컵 경기장으로 골인하는 것이 하프 코스였다.
전철을 갈아타고 광화문 역에 도착하니 휴일 이른 시간에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만이 역사와 광화문 광장에 그득했다.
두 달 전 같은 장소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동아마라톤에 참가했었던 나는 사람들이 더 모이기 전에 빨리 짐을 맡기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근처에는 식전 행사로 시끌벅적했고 들뜬 참가자들이 이리저리 방황하듯 떠다녀서 차분히 달리기 준비를 하기에는 복잡했다. 그래도 흥겨운 행사 분위기를 잠깐 구경하다가 도로 통제의 최북단인 광장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통인동에서 인사동 양방향 차량이 오고 가는 신호등을 건너 최근에 복원한 광화문 월대로 갔다. 북적이는 광장과 달리 이곳은 한산해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가볍게 조깅을 하며 준비 운동을 하기에 알맞았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풀었다. 해가 떠서 한낮에는 꽤 더울 것처럼 보였다.
경기가 시작됐다. 심판이 있기는 하지만 주된 역할은 없고 오직 선수 개인이 정해진 코스를 따라서 자기 기량대로 달려서 정해진 피니시 지점에 도달하는 자신과의 게임을 수만 명의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시도했다가 별 소득 없이 끝난 초반 느리게 뛰기 방법을 버리고 내가 편하고 익숙한 속도로 뛰되 중반 이후와 막판에 쓸 힘을 비축해 두는 전략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1km는 5:37, 2km 5:15, 3km 5:06, 4km 4:57 정도로 달렸는데 평소와 비슷하거나 조금 빠르게 달리는 느낌이 들었고 숨이 차거나 힘든 느낌은 없었다. 비교적 잠도 잘 자고 컨디션도 좋았던 아침이라 몸이 가벼울 줄 알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마포를 지나서 한강 다리 위로 올라섰다. 처음 나타난 5km 급수대는 그냥 지나쳤다. 5km마다 네 번 제공되는 급수는 한번 내지 두 번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여의도 공원 구간이 좀 지루했다. 터널 구간에는 흥겨운 디제잉 쇼를 한다고 홍보하더니 막상 달리면서 지나쳐보니 별 감동이 없어서 허무했다. 확실히 동아마라톤보다는 거리 응원이나 다양한 지역의 러닝크루 응원이 약했다. 하지만 하프 마라톤 대회에 이 정도의 인파가 응원단으로 나왔다는 것은 마라톤이라는 운동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10km 지점을 통과한 뒤 힘이 떨어진다거나 고단함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에너지젤을 하나 꺼내서 먹었다. 아침으로 떡 두덩이와 간식을 먹었지만 출발할 무렵에는 허기가 느껴져서 바지에 꽂아 둔 에너지젤 하나는 이미 먹어두었었다. 나는 일본 제품 '아미노바이탈'을 애용하는데 달리면서 먹기에 좋은 젤 형태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래가 걸릴 수 있으므로 천천히 조금씩 입에 짜 넣어서 녹이듯 먹어야 달리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 LSD 훈련이나 풀 코스에도 10km마다 하나씩 먹어보면 확실하게 기운이 나고 힘이 떨어지지 않는 점을 느낄 수 있어서 선뜻 다른 제품으로 갈아타지지가 않는다.
어찌어찌 양화대교까지 와서 다시 한강을 건너는데 이때쯤 시원한 바람이 불어줘서 달리기가 한결 쉬워졌다. 합정역부터 망원역 지나서 마포구정역 앞까지는 계속 완만한 오르막이었고 다른 이들이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제까지 거의 대부분 내 앞에 달리는 주자들을 따라잡으면서 왔는데 망원역 부근에서 다른 주자들의 배번호를 쳐다봤다. 마라톤 출발은 경기 참가를 신청하면서 제출한 자신의 예전 마라톤 기록에 따라서 출발 그룹이 정해지는데 나는 A, B그룹에 이어 C그룹으로 세 번째 그룹이었다. 내 실력이 세 번째 그룹이라는 것이고 내 앞에 그룹 선수들은 나보다 빠른 사람들이라는 건데 내가 이때 다른 참가자들의 배번호를 보니 A그룹과 B그룹이 많이 보였고 C 그룹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D그룹 번호표도 보여서 실력대로 출발 그룹을 나눈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월드컵 경기장까지 왔다. 여기부터 오르막길을 3, 4km 더 가다가 돌아와서 월드컵 경기장으로 들어오면 끝이었다. 이쯤부터 힘들다는 느낌이 조금 들긴 했는데 못 견딜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늘어지려는 속도를 다시 잡으려 노력했던 내 모습이 스플릿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게 보인다.
17km 4:59, 18km 5:07, 19km 5:09, 20km에는 막판 스퍼트라고 4:54로 달렸다. 이 부근이 아마 경기장으로 꺾어지는 지점일 텐데 멀리서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했고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황급히 속도를 올려서 질주를 했다. 좀 더 먼 지점부터 결승점이 보였다면 최소한 500m 이상은 빠르게 달리면서 경기를 마감했을 텐데 내 스퍼트는 2, 300m쯤 됐을 것 같다.
그렇게 서울하프마라톤을 마치고 나름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들어와 자봉들이 주는 음료수와 완주 간식, 메달 등을 받아 들고 그늘을 찾아 주저앉았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메달도 구경하다가 경기를 마치고 스트레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몸을 풀었다. 그제야 내 기록이 궁금해지고 시계를 보는데 아차, 애플워치를 정지시키는 것을 잊고 계속 있었던 것이다. 2, 3분쯤 기록이 멈춰 선 채 느려진 것이 못마땅했으나 곧 주최 측에서 내 기록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와서 정확한 기록을 알게 되었는데 꽤 만족할 만한 기록이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경기가 끝났다.
마지막에 질주할 수 있어서 좋았고 달린 후에도 아무런 부상이나 통증이 없어서 더 기뻤다. 아내에게 메달 사진과 기록증을 카톡으로 보냈더니 기록이 좋다고 답장이 왔다. 여러 차례 대회에 참가해 본 뒤 늘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처음으로 만족감에 경기장을 나서는 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