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등산과 트레킹에 빠져있었고 평상시에는 짐에 다니면서 근력운동을 신체 각 부위별로 주 3-4회 하는 일상을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이년 전쯤부터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등산과 트레킹은 슬며시 내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이유는 산에 갈 시간이 나질 않아서이다.
등산과 골프가 비슷한 점이 있다면 둘 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전철 타고 가는 근교 산이건,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는 지방 산이건 등산은 일단 반나절 이상, 길면 일박 이상이 걸리게 된다. 출발 전에는 등산 시간에 맞게 간식과 물, 필수 장비들을 챙기느라 배낭도 꾸려야 하고 돌아와서는 다음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비해서 챙겨두어야 한다.
국립공원의 대피소나 둘레길을 걷는 일정이라면 미리 예약을 하거나 숙소를 알아봐야 하고 돌아오는 편의 교통 상황도 체크해야 한다. 정 안되면 혼자서도 훌쩍 떠나는 편이지만 웬만하면 동행이 있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기 때문에 같이 갈 사람도 알아보느라 전화를 돌려야 하기도 한다.
그러니 등산이나 트레킹은 품도 많이 팔아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취미인 것이다.
달리기는 시작부터 마치는 데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달릴까 하는 생각이 들면 눈을 들어 날씨만 확인하고 잽싸게 반바지와 티셔츠를 걸친 채 밖으로 나오면 준비 끝이다. 계절과 상황에 맞게 모자와 선크림, 팔토시와 바람막이, 모자, 귀마개, 헤드밴드 등을 챙겨야 하지만 5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달린다.
집 주변이나 트랙이 있는 운동장을 달리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같은 곳을 달리느라 지겹다면 인근 다른 코스를 달리면 된다. 여행이나 출장 중에도 러닝화와 반바지 정도만 챙긴다면 새로운 환경과 배경에서 달리는 재미를 느껴볼 수 있다. 한 시간쯤 달리고 돌아와 스트레칭으로 마무리를 하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도 달리기 하러 나간 시간에서 90분쯤이 경과해 있을 뿐이다. 평일이라면 그대로 출근을 해도 하루 일정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달리기 클럽에 가입해서 훈련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는 혼자서 달린다.
달리기에 동행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내 컨디션과 내가 편한 속도로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달린다. 달리다가 힘이 든다면 중간에 돌아와도 좋고 몸도 가볍고 기분도 좋다면 평소보다 빠르고 멀리까지 뛸 수도 있다. 혼자 즐기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달리기는 얼마든지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시도와 모험이 가능하고 반대로 어이없고 김 빠지는 중도 포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라톤 대회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이 하는 일은...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우승권 내의 선수들의 신상과 본인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거나 출발지점부터 골인 지점까지의 코스 거리를 확인하는 일, 반환점과 급수대 설치 포인트 등을 점검하는 일이 심판의 임무가 아닐까. 심판이 달리고 있는 선수에게 개입하는 일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골프와 달리기가 비슷한 점이 또 하나 있다면 심판의 개입이 최소화된 경기이고 선수가 대부분의 상황에 대처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골프 스코어는 선수가 직접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고 달리기 역시 자기 신발이나 번호표에 부착된 센서가 기록을 해주므로 선수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넓은 주로의 한가운데를 뛰던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이겠다고 코스 안쪽으로만 뛰던 그건 선수가 선택할 문제이다. 주로를 벗어나거나 달리기 외의 방법으로 거리를 줄이는 이상한 행동만 아니라면 경기는 온전히 선수의 판단과 자율에 맡긴다. 그래서 달리기는 자기 자신과의 경주라는 말이 생긴 듯하고 골인 지점에 정해진 시간 내에 들어왔다면 누구나 완주 메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달리기 입문자 시절, 잘 달리는 회원들이 서로 자신의 기록을 비교하거나 확인하며 더 빠르게 뛰지 못해서 후회하거나 자신보다 빠른 선수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속한 달리기 클럽의 단체 티셔츠에는 커다랗게 '내 속도로 달리는 것이 행복이다 Happiness is Running at my speed'라고 써 붙여 놓고 있으니 더 의아했다. 자기 속도로 달려서 안전하게 완주했으면 기쁘고 행복해야 할 일 같은데 만족하기 보다는 대부분 더 빨리 달리려고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다행히 기록이 좋게 나오면 기뻐하고 서로 축하해 주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편한 속도로 달려서 한 시간에 10km를 뛴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을 달려도 몸이 견디고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하고 행복했다. 나에게 달리기를 권한 내 형에게 나는 지금도 너무 좋은데 굳이 풀코스를 준비하고 고통스럽게 인상을 쓰면서 42km를 달려야 하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형은 웃으면서 지금이 좋다면 굳이 풀코스를 달릴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냥 내가 좋은 만큼 내 마음대로 그렇게 달렸는데, 희한한 건 나도 어느새 다른 사람들처럼 내 달리기 기록을 보면서 지난 기록과 비교하고 조금씩 빨라지는 내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빨라지면 기분이 좋으니까 달릴 때에 지난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요령을 기억하고 반복한다.
호흡이나 식사, 물, 주법 등 작은 변화인 것 같지만 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고 그것은 내 기록으로 입증되고 있었다.
빨리 달리는 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달리기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것은 같은 거리를 얼마나 빠르게 뛰었는지, 같은 속도로 뛰었다면 얼마나 멀리까지 뛰었는지가 나의 성장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에 연연하는 것으로 보였던 달리기 선배들의 모습은 기록이 늦은 날이나 특정 구간에서의 특이할 만한 기록을 유심히 살피고 원인을 분석해서 다음 달리기에서 보정하고 개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기는 어제의 자신과 홀로 겨루는 경기이다.
혼자 자신의 기록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찾아내어 시도해 보고 달리기 성능을 향상하는 게임이다. 부상을 방지하면서 속도를 올리거나 좋은 기록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연구한다. 다양한 경기에 출전해서 공인 기록을 확보하고 동호인들과 경험을 나누면서 서로 잘 달릴 수 있는 조언과 격려를 주고받는다. 그러면 '내 속도로 달리는 것이 행복이다'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