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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Aug 21. 2024

위험! 로마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요즘 읽고 있는 콜린 매컬로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과목은 기억나지만 선생님이나 기억나는 수업 내용은 없다. 수업시간에 거의 집중하지 않았고 당연히 성적도 좋지 않았다. 세계사는 기술, 지리 같은 과목과 묶여서 '암기과목'으로 치부되었고 관심 없어하는 학생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국제정세에 관심이 생기면서 유럽사가 궁금해졌고, 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자주 다니다 보니 유럽 곳곳에서 발견되는 로마 유적이 신기하고 또 의아했다. 한편으로 오랫동안 기독교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신약 성서 곳곳에 등장하는 진한 로마의 흔적들이(심지어 로마서도 있다!) 유럽과 로마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다. 


공부하라고 할 때는 안 하더니 나이 먹고 다 늦게 세계사 책을 사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읽은 책은 "곰브리치 세계사". 책의 표지에는 '세계적인 석학 곰브리치의 명저 세계사 입문서의 결정판!'이라고 동그란 홍보 스티커를 붙여 놓았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450페이지쯤의 분량 한 권에 많은 분량의 세계사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잘 축약시켜서 지루하지 않게 완독할 수 있다. 


그다음에 내가 읽은 책은 만화책이다. 

내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세트로 구입한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인데 역시 아이들은 보지 않고 내가 재미나게 읽었다. 이원복의 만화는 세계사라기보다는 그가 경험하고 공부한 나라의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역사와 문화를 서술한 것이어서 다분히 주관적이고 그가 알고 있는 부분만 다루고 지나치는 부분이 있다. 

이쯤에서 깊이 있게 세계사를 한번 훑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서 J.M. 로버츠와 O.A. 베스타가 지은 세계사 1, 2를 읽었다. 두껍고 방대한 분량으로 유럽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사를 읽고 나도 유럽의 왕족들과 여러 민족들 간의 합종연횡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왜 저들은 이렇게 뭉쳤다가 저렇게 분리되는가? 

왜 유럽의 왕가들은 저리도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있는가?

재미난 책 옆에 재미난 책, 그 옆에 또 재미난 책...

이 시기에 나는 유럽사에 잠시 흥미를 잃고 있었는데 마침 넷플릭스에서 재밌는 시리즈가 있다고 누가 알려주었다. 제목은 "스파르타쿠스". 

이미 여러 번 영화화된 고대 로마 시절의 인물과 사건이었는데 꽤 긴 분량의 이 미니시리즈는 무척 흥미진진했다. 글래디에이터와 그들을 양성시키고 경기를 벌이는, 지금으로 치면 영화배급자나 권투 경기의 프로모터 로마인과 귀족들의 갈등을 담아냈는데 표현이 노골적이고 잔인한 묘사도 수위가 높아서 이야기 몰입도가 높았다.  넷플릭스에서 이 재미난 로마 공화정 말기 시대극을 보고 나니 로마사에 급 관심이 생겨서 그때까지 여러 번 읽기를 시도했어도 번번이 실패한 방대한 분량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마침내 읽게 되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여러 사람이 지적한 대로 시오노 나나미의 편향되고 왜곡된 해석은 책 읽기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되었지만 공화정 이전의 로마 시절부터 로마의 멸망 시기까지 긴 세월 동안의 로마를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소개한 그녀의 공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포에니 전쟁과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책을 읽으며 손에 땀을 쥐게 했고 동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등장과 그의 짧고 굵은 활약은 그의 빠른 역사에서의 퇴장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이어지는 아우구스투스와 여러 황제들의 치세와 전쟁으로 지중해 전역과 동방까지 정복하는 로마의 박진감 넘치는 종횡무진을 보고 있노라면  왜 나는 이제서야 로마를 알게 되었을까 탄식하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된 로마사와 로마 이야기는 내가 여행했던 유럽 곳곳에 아직도 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있어서 2천 년이라는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그들이 지은 멋진 원형 경기장과 극장들은 아직도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되고 가끔씩은 유럽 축구팀의 경기장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나는 로마에 흠뻑 빠져있다가 내가 수십 년 전 로마를 여행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1990년대였으니 모든 게 아날로그였던 시절, 먼지나는 책장 아래 보관함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보았다. 

세상에.... 나는 책을 읽으며 나중에 언젠가 꼭 방문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던 로마의 명소들이 여럿 있었는데 사진첩에서 발견한 내 로마 여행 사진들은 모두 그 유적지 앞에서 해맑게 웃는 모습들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나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그리파의 판테온에서 포즈를 취했지만 내 배경의 그 건축물이 2천 년 전에 무엇을 기념하려고 지은 것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내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곳들은 유럽사에 까막눈이었던 시절 이미 다 발도장을 찍어 둔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콜린 매컬로우의 <마스터즈 오브 로마> 7부작의 "포르투나의 선택"을 읽고 있다. 

로마를 다룬 책들 중에 가장 널리 칭송받고 있는 책인데 "가시나무 새"를 써서 대박을 친 호주 아줌마 매컬로우가 눈이 멀어가면서 로마를 공부하고 고증하면서 쓴 책이다. 이 방대한 양의 책들은 <소설> 형식으로 쓴 로마 이야기인데 그간 내가 읽고 찬양한 박경리와 박완서에 버금가는 아줌마 소설가로 그녀의 헌신적인 로마 연구와 집필에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총 7부작 중에 3부를 읽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벌써부터 읽을 양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피어난다.  


시오노 나나미나 콜린 매컬로우나 아줌마 작가들인데 두 여성 모두 카이사르에 푹 빠져있고 그를 흠모해마지 않는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내가 봐도 그는 정말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의 정치력과 친화력, 전술과 전략, 그리고 그 빼어난 글솜씨!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고 만다. 자신이 그렇게 빨리 암살당할 것을 예견하진 않은 듯한데 제 명을 다 하진 않을 것은 알았는지 후계 구도까지 치밀하게 계획해 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제까지는 그의 부모 시절의 전쟁과 내전 등의 이야기로 1, 2부를 보내고 지금 읽고 있는 부분에서야 카이사르는 10대 후반의 소년이 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펼쳐질 그의 활약에 벌써부터 책을 쥔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2천 년 전 인물에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체험이다. 아울러 이런 세세한 수천 년 전의 기록들이 남아있고 보존되어 온 유럽의 특수성이 부럽고 놀라울 따름이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스페인이 왕과 왕실을 없애려다가 어렵더라도 보존하기로 한 결정, 지역감정을 넘어선 이탈리아의 내부 지역 갈등, 쪼그라들고 존재감 없어진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각종 사안들에 관심이 생긴다면 세계사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사를 읽고 나면 중세와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세계사는 결국 로마의 팽창과 몰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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