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는 명언
상상 피로골절 이슈로 열심히 하던 연습을 2주간 쉬고 나온 대회는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2024 서울 Race였다. 피로골절 이슈를 만들었던 청원 생명쌀 대청호 마라톤 이후로 우울하게 달리기를 쉬고 있다가 피로골절이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뒤 다시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지만 서울 Race에 이은 JTBC 마라톤 등의 대회가 임박하여 초조하기도 했다.
조중동 세 신문사가 주관하는 춘마, 제마, 동마가 풀코스를 포함한 국내 메이저 대회라면 조선일보의 서울 하프 마라톤 대회와 동아일보의 서울 Race는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프 코스 마라톤 대회로 역시 메이저급이었다. 메이저 급을 판단하는 데에는 접수의 어려움과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를 확보했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어려운 관문 같은 접수령을 넘어서 대회 날이 되었고 시청광장이 출발 및 골인 지점이니 전철로 왕복할 수 있는 편의성 좋은 대회였다.
출발 시간은 8시로 이른 편이어서 나는 광장에 6시 반쯤 도착했다. 광장에는 벌써 참가자들로 북쩍였는데 도착 즉시 경기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보관소에 맡겨야 준비 러닝을 할 수 있다. 또 대회장 주변 화장실은 경기 전 용변을 해결하려는 사람으로 늘 긴 줄이 늘어서있기 마련이라 될수록 서둘러 일을 마쳐야 줄 서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아침 일찍 나오느라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나는 전철역 앞의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 세실 극장 옆 성공회 성당 근처였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이 성공회 성당에서 열렸는데 덕분에 나는 성공회 성당 내부에 깔끔하고 한적한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찾아가 보니 역시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쾌적하게 옷도 갈아입고 용무도 마치고 소지품도 맡기고 홀가분하게 준비 러닝을 했다.
이번 대회는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주최 측의 출발에 관한 공지와 경고가 잦았는데 타 대회의 공인 기록을 제출한 사람들을 먼저 출발하게 했고 미제출자를 나중에 뛰게 했는데 그 사이에 기록을 제출한 11km 대회 참가자를 끼워 넣어 좀 복잡하고 번거로워 보였다. 어차피 기록은 각자 몸에 부착한 센서로 측정되기 때문에 좀 먼저 뛰나 나중에 뛰나 마찬가지 일 텐데 순서를 따르지 않고 먼저 출발하면 '실격' 처리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으면서 문자 메시지를 여러 차례 보내왔던 것이다.
사실 기록이 좋고 빠른 주자들은 앞에서 뛰는 걸 선호한다. 자기보다 느린 주자들이 앞에 있으면 그들을 앞지르느라 이리저리 길을 파헤치고 다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대회 공식 길이보다 긴 거리를 달려야 하기 때문이고 추월하다가 다른 선수와 부딪히게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제출한 나는 엉겁결에 출발그룹 선두 무리와 함께 대기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꽤나 잘 달리는 영건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출발!
코스는 서울 광장 옆 세종로. 경복궁 방향으로 올라가서 청와대 입구까지 달렸다가 경복궁을 한 바퀴 삥 돌아 내려와서 남대문까지 내리막길, 그리고 을지로로 들어가서 5가까지 갔다가 유턴해서 광교 근처까지 올라오고 그 다음엔 청계천을 따라서 끝까지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훈련 부족으로 몸이 가벼운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름철 운동한 효과가 조금이라도 반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갖고 뛰었다.
선두 그룹은 정말 시작부터 빨랐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마라톤 경기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경계하며 살살 뛰다가 3-5km쯤 지나면 자기 페이스 속도로 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주법이었다. 그들이 초반이라고 천천히 달리는 속도가 내게는 버거울 정도로 빨랐다. 그들 속도에 말려들지 않고 나는 내 속도로 뛰겠다고 속도를 늦추었다. 그런데도 내 기록을 보니 5분 초반대 속도였다. 내가 평소에 달리는 속도 중 가장 빠른 속도인 것이다. 나야 최고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느릿느릿 정속을 향해 빌드업을 해가는 중인지 모두들 나를 앞질러 달려가고 나는 끊임없이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선수들의 행렬에 무심하게 내 나름대로 달렸다.
빠른 사람들 속에서 달리니 저절로 내 속도가 줄지 않고 계속해서 5분 초반대의 빠른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느덧 을지로 반환점을 도는 지점까지 왔다. 반환점을 돌아서 광교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선 반환점을 향해 내려오는 후발주자들을 볼 수가 있는데 나는 여기서 여러 명의 우리 클럽 선수들을 발견하고 의아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아직도 반환점을 돌지 않은 거지? 빠르게 뛰고 경력도 오래된 몇 명의 선수들이 나보다 뒤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출발이 나보다 뒤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가 5km는 이미 지난 시점이어서 원래대로라면 이미 나를 추월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빠르게 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10km 지점을 통과하기 전이긴 했지만 나는 현재 속도대로만 달려준다면 오늘 개인 기록을 달성할 수도 있겠다는 낙관을 하게 되었다.
숨이 좀 차긴 했지만 어느 대회든 늘 숨이 차고 힘들기 마련이다. 다행히 발가락, 무릎 어디서도 아픈 신호를 보내오지 않는다. 아직도 사람들은 계속 나를 추월하고 있지만 나도 느리게 뛰고 있지만은 않은지 내 주변에는 어느새 나와 속도가 비슷한 주자들과 그룹을 만들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은 머리에 면사포를 쓰고 달리는 젊은 여성이었는데 결혼식을 앞둔 신부 콘셉트이었다. 그 여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나와 유일하게 보조를 맞추어서 뛴 선수였다.
8km 지점에서 파워젤을 하나 먹고 급수대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물을 받아먹었다. 청계로에 들어서자 이전보다 몸이 더 무거워졌고 숨도 차서 심박수가 오르는 게 보였다. 청계천 반환점을 돌아야 경기가 종반으로 접어드는 것일 텐데 아무리 뛰어도 반환점이 나오질 않아서 자꾸 시계를 보고 km 수를 확인했다. 지긋지긋해지고 몸도 피로도가 완전히 고조될 무렵 드디어 반환점이 나왔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했다. 을지로 반환점에서 본 우리 클럽의 빠른 주자들은 이미 나를 추월했고 여성 주자들과 주력이 짧은 선수들도 나를 추월했다. 면사포는 반환점을 돌기 훨씬 전에 나를 두고 앞서 달려 나갔고 나는 점점 모든 사람이 추월하는 '서울 Race 호구'가 되어 가고 있었다.
15km 지점을 넘긴 후로 속도가 뚝 떨어졌다. 이후로 계속 쭉쭉 떨어졌다. 계속 달리기가 힘들고 어려웠다. 초반에 너무 감당 못할 속도로 달린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6km에서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고 파워젤을 다시 먹어봤지만 달리기는 계속 느려질 뿐이었다. 차라리 걸을까, 잠깐 걸으면 나아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프에서 걷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속도는 어느새 6분대를 넘어섰고 이대로 가다가는 7분대까지도 떨어지겠다고 생각할 무렵 할렐루야, 골인 지점이 나타났다.
이렇게 나는 연습 부족에 초반 페이스 조절 실패를 합친 더블 악재 속에 경기를 마쳤다. 골인 후 내 기록을 보니 가관이었다. 초반 15km는 평소 내 속도보다 빠르게 잘 달렸지만 이후 5km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경기를 마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지만 대회에서 나눠준 빵을 반도 먹지 못했다. 배는 고픈데 음식은 안 먹어지는 희한한 증상이다.
하프대회여서 다행이었다.
무모하게 첫 끗발을 세웠다가는 경기 운영을 망친다는 것을 배우게 한 대회였다.
연습하고 초반에는 절대로 무리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