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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빠 달려

달리기 실력이 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

효과가 틀림없다!

by 이프로

겨울이 춥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건 당연한 일, 문제는 그런 악천후에도 연습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적은 일수의 2월이 지나면 도적같이 봄 대회는 찾아온다. 연습한 자에게는 설레는 자기 측정의 순간이고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대회가 될 테지만, 추우니까 쉬고 눈 오니까 쉰 자에게는 처절한 나락의 시간들이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올 겨울처럼 눈이 많이 오고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쉴 틈 없이 강추위가 몰아닥치면 할 수 없이 트레드밀에 올라 세상에서 제일 지루하고 재미없는 달리기를 해야 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텐데 로드나 트랙에서 달리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트레드밀에서는 정말 속도도 느려지고 거리도 줄어든다. 땀은 더 많이 흘리게 돼서 수건으로 닦아내지만 불어오는 바람이나 달리면서 내가 일으키는 바람에 몸을 식혀주는 통기가 전혀 없으니 축축해지는 운동복만큼 불쾌지수도 올라간다. 트레드밀에서만 계속 뛰면 기록이 저조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잠깐 날씨가 좋아지면 다운베스트를 입고 버프를 두르며 로드런을 해보는데 속도가 나질 않는다. 약한 업힐이 나와도 호흡이 거칠어지고 대회를 앞두고 달려 본 LSD 훈련도 간신히 마친다. 트레드밀 러닝이 미치는 악영향이다.


기량이 떨어지고 몸도 잘 따라주지 않는 느낌.

이럴 땐 막판 처방을 한번 사용해 볼 필요가 있다. 가끔씩 시도해 보는 이 방법은 꽤나 잘 먹힌다.

기분도 좋아지고 효과도 지속된다. 그것은 바로 '탕진잼'이다.

평소에 입고 싶었던, 신고 싶었던 아이템들을 한 번에 과감하게 지르는 것이다. 찔끔찔끔 하나씩 샀다가는 효과가 없고 한번에 여러개를 '확' 질러버려야 좋다.


나는 그동안 5인치 쇼츠를 주로 입었는데 대회에 나가보면 의외로 3인치 쇼츠를 입고 달리는 선수들을 흔하게 보게 된다. 나도 한번 주문했다가 너무 짧아서 반품한 적이 있는데 남이 입은 것을 보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그 쇼츠의 컬러인데 내가 속한 러닝 크루의 회원이 입은 핫핑크 쇼츠를 보고 이쁘다는 생각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나도 핑크나 빨강색 쇼츠를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뭐 잘 생긴 연예인이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턱시도를 보거나 예쁜 몸을 만든 남자가 근육이 드러나는 달라붙는 의상을 입었을 때도 한번 입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볼이 넉넉한 뉴발란스 카본화를 구입하다 보니 핑크색 러닝화를 신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3월에 있을 '2025년 서울 동아마라톤 에디션'이라며 아디다스에서 출시한 빨강색 아디오스 러닝화를 구입하게 되면서 이런 색깔에 어울리는 쇼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렬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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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구입한 달리기 용품들

희한한 건 핑크색과 빨강색 쇼츠가 꽤 인기가 있음에도 시중에 나와있는 제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국내 제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고 직구로 수입을 해야 하거나 출시된 제품이 품절 상태인 나이키나 뉴발란스 홈페이지에 기약 없는 대기를 하다가 어렵게 구해지는 행운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몇 주 전에 빨강색 아디다스 러닝화를 구입한 나는 러닝용품을 파는 제조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통풍 잘되는 모자를 한두 개 골라볼까 구경하고 있었는데 나이키에서 빨강색 쇼츠를 팔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잽싸게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좀 더 둘러보니 핑크색도 있었다. 이번에는 아디다스 홈피도 들러서 레트로 감성의 러닝티도 몇 개 담았다. 애초에 구입하려던 모자도 두어 개 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빨강색 4인치 쇼츠와 핑크색 쇼츠, 러닝 티셔츠 몇 개와 러닝 모자를 담은 택배 박스와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씩 열어보고 입어보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라벨을 잘라내고 세탁기에 한번 돌려서 널어놓은 뒤 자던 밤 꿈속에서 나는 새로 산 신발과 빨강색 쇼츠, 티셔츠를 입고 달리고 있었다. 손주 볼 나이의 중늙은이가 새로 산 조깅 빤스 입을 생각에 꿈을 꾼 것이다. 혼자 웃었지만 다음날 트레드밀 달리기는 평소와 다르게 신명이 나고 기분이 들떠서 재미나게 달렸다. 기록도 좋고 지치지도 않아서 달리기를 마치고 나서 벤치프레스를 하고 하체 보강 운동도 했다.


춥고 바람 부는 날씨에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늘어지고 답답할 때, 혹은 트레드밀에서 계속 달리다 보니 달리기가 지겨워지고 재미가 떨어질 때 어차피 오래된 운동복을 바꿔야 한다면 정신이 번쩍 드는 과감한 색상이나 그동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짧은 쇼츠를 구입하는 것은 효과적인 충격 처방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달리기라는 운동을 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지친 당신!

그동안 입고 싶었던, 신고 싶었던 운동용품을 질러라.

예쁜 러닝화, 예쁜 쇼츠를 입으면 달리기가 즐겁고 신이 난다.

숨이 차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달리기를 하는데 기쁜 마음이 든다니 정말일까 싶겠지만 시도해 보라.

세상에, 그 고통스러운 달리기를 하는데 신이 난다면 그깟 몇만 원이 무슨 대수겠는가.


빤쓰와 운동화가 필요한 장비의 다인데 그까짓 거 질러도 수백만 원대 골프클럽과 그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비싼 회원권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당신이 부려도 되는 사치다. 달려서 튼튼하게 만든 심장과 혈관 덕에 굳은 콜레스테롤 약값과 혈압약, 당뇨약에 비할 바가 전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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