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와 구글 제미나이가 나에게 준 조언
작년 겨울 방학 기간 동안 추운 한국의 날씨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서 지내면서 달리기도 하고 책도 좀 읽으며 보내기 좋은 곳을 챗GPT에게 물어봤었다. 그럴싸한 답을 내놓은 지피티에게 비행시간이 5시간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추가 단서를 달았었는데 AI가 제안한 몇 개의 후보지 중에서 나는 베트남의 다낭과 호이안, 호찌민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선택했었다.
내가 가려던 겨울 시즌이 베트남의 건기라 비가 덜 오고 날씨가 온화하다는 것이 나를 이끈 주요 포인트였었다. 그러나 다낭에 도착하고 나니 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렸고, 내리는 비는 거의 하루 종일 내렸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로 빠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후다닥 뛰어나가서 해변을 달렸는데 그래도 뛰는 중간에 비는 다시 내리기 일쑤여서 돌아올 때는 늘 몸이 젖어서 입술이 파래졌었다.
다낭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호이안에서도 상황은 비슷했고 베트남의 남쪽인 호찌민으로 내려가자 다행히 비는 그쳤다. 날씨도 훨씬 따뜻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눈에 띄게 가벼웠다. 그런데 너무 따뜻했다.
비가 안 오고 기온이 올라서 다행이었지만 호찌민은 너무 더웠고 너무 습했다.
한국에서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낭과 호이안은 달리기에 좋은 해변가 도로가 길게 이어졌지만 호찌민은 과밀인구 도시여서 오토바이 부대가 늘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하는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 행렬이 뜸한 베트남의 부유한 동네 도로를 돌거나 공원을 끼고 달렸다.
챗GPT의 제안을 받아들인 겨울방학 달리기 여행은 건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내가 바랬던 점들을 적절하게 맞추어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나는 다낭과 호찌민이라는 나름 재미있고 재방문 의사가 있는 도시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여름방학이었다. 한국의 숨 막히는 고온다습 기후는 종강 무렵인 6월부터 기승을 부렸고 역시나 한국을 피해 달리기 좋은 코스를 제안해 달라는 부탁을 챗GPT와 구글 제미나이에게 해 보았다. 에이아이가 제안한 장소는 중국의 쿤밍, 베트남의 사파,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반둥이었다. 세 곳 모두 동남아 지역의 열대성 기후 지방이었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어서 기온이 낮고 덥지 않다고 했다. 재밌는 건 내가 이미 쿤밍에서 일 년을 거주한 경험이 있다는 것과 쿤밍에 살 때 기차를 타고 베트남의 사파 지역 여행도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알려준 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여름에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세 곳 중 이미 나는 두 곳을 경험한 상태인 것인데 이것이 오히려 AI의 제안에 신뢰를 더해주었다. 쿤밍과 사파는 내가 경험해 보았지만 정말로 한여름에 달리기를 해도 전혀 어려움이 없는 최적의 날씨를 가진 도시인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정답을 AI가 맞혀냈으니 그가 제안한 나머지 한 도시인 인도네시아 반둥 역시 여름 달리기에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를 왔다. 전 세계에서 막강한 여권파워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여권이지만 인도네시아를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했다. 신청하면 무조건 나오는 이런 비자를 신청하며 수수료를 낼 때면 국가가 여행객을 상대로 삥을 뜯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네팔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는데 (중국은 최근 한국 여행객들에게 관광 비자 면제를 일시적으로 풀어주긴 했다.) 이렇게 삥을 뜯는 것이 요즘 추세인지 이제는 미국도 호주도 캐나다도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E-Visa를 신청하게 하면서 수수료 명목으로 수십만 원씩 뜯어간다.
자카르타에 도착 후 너무나 세련되고 빠른 인도네시아 고속철 woosh를 타고 다음날 반둥으로 왔다. 자카르타는 매연에 고온다습한 동남아의 전형적인 기후였는데 반둥은 정말로 시원했다. 내가 도착한 한낮은 후덥지근하고 햇볕에 있으면 땀이 흐르는 날씨였지만 그늘에 있으면 더위가 사라지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서 못 견딜 더위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침저녁으로는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지면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사람들은 모두 긴소매 옷과 긴바지뿐만 아니라 가벼운 재킷을 입은 모습이 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있으니 인도네시아가 엄청나게 큰 나라라는 것과 반둥이 속한 섬 자바는 적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서 남반구라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한 6월 말은 하지가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다시 말해서 일 년 중 해가 제일 긴 즈음인데 남반구인 도시 반둥에서는 겨울에 해당하는지 오후 네다섯 시 무렵이면 어둑어둑해졌고 여섯 시쯤이면 벌써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해 뜨는 시간 역시 늦어서 6월 말 7월 초인데도 5시면 캄캄하고 6시가 되어야 사위가 환해졌다. 덕분에 한국과 두 시간 시차가 있음에도 나는 한국에 있을 때와 비슷한 시간인 오전 7시쯤 일어나 (반둥 시간 오전 5시) 아침을 먹고 8시쯤(반둥 시간 오전 6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AI 사용법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대개는 원하는 것만 물어보고 AI는 당연하게도 물어본 것에만 답을 한다. 내가 요번에 구글제미나이에게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것이 있으니 덥지 않고 덜 습한 기후에 집중하느라 '달리기 인프라'를 간과한 것이다. 겨울방학에 챗GPT의 제안에 따른 베트남은 나름 달리기에 불편함이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낭과 호이안은 긴 해안가를 이어가는 해안도로가 적절한 달리기 트랙 역할을 해주고 쾌적했다. 호찌민은 도시라 그런 긴 코스의 달리기 도로는 없었지만 주택가의 널찍한 도로를 사용해 아침에 10km 코스를 만들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반둥은 아침저녁으로 서늘하고 시원한 기후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고 있었지만 달리기를 할 도로가 부족했다. 이 부분을 더 알아보고 왔어야 했지만 나는 매년 반둥에서 열리는 반둥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마라톤 대회를 열 정도의 도시라면 달리기 인프라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방심한 것이다.
반둥의 도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새벽 시간까지 오토바이로 빽빽하다. 인도는 거의 없고 인도가 있는 지역에는 행상들이 좌판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도로를 걷는 행인들은 거의 없다. 다 오토바이다.
가까워도 오토바이 멀어도 오토바이.
걷는 사람은 아주 가난하거나 외국인이다. 여기서 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기를 비롯한 각종 운동기록을 담아주는 애플리케이션 '스트라바'에는 지구 곳곳의 코스를 달리는 사람들의 빈도수를 반영한 '히트맵'을 공개하고 있다. 내 호텔이 있는 지역의 러닝 히트맵을 검색해 보자 다행히 인근에 코스가 있었다. 베트남의 호찌민과 비슷한 식인데 근처의 부자 동네 지역이 러닝코스였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도록 경비원이 바리케이드를 쳐놓은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도로를 이 지역 러너들이 달리기 코스로 이용하고 있었다. 거주민 외에는 경비원들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오토바이들이 거의 없었고 이른 아침 시간에는 차량 이동도 뜸한데 그리 많지 않은 러너들은 경비원들이 별 제지 없이 이 지역에 출입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오토바이와 부딪힐 염려 없이 달릴 수가 있었다.
첫날은 달릴 길을 찾지 못하고 호텔 주변을 뺑뺑 돌아서 10km를 뛰었는데 둘째 날부터는 아침마다 늘씬한 야자수가 늘어서고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반둥의 부촌을 달리고 있다.
아직 기간이 좀 더 남아서 호텔을 시내 중심가로 옮길 예정인데 시내에는 달리기 트랙이 있어서 아마도 그곳을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