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공주 백제마라톤 32km 우중런
지난주 철원 DMZ평화마라톤을 시작으로 2025년 가을 시즌을 시작했다.
6월부터 시작된 더위와 지칠 줄 모르고 9월 초까지 이어진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지만 마라톤을 준비하는 이들은 묵묵히 훈련을 이어나갔고 이제 드디어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일주일 전부터 기상예보를 확인했는데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강수확률과 강수량은 점점 늘어나더니 전날에는 충남뿐 아니라 전국 강수확률 90%에 강수량도 오전부터 점차 늘어나는 것으로 확산되어 대회에서 비를 피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달리기를 하려다가도 날씨가 궂으면 뛰기 좋은 상태를 기다렸다가 뛰는 스타일이었지만 대회 당일 날씨는 참고 달리는 것 외에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다이소에서 구입한 천 원짜리 우비 하나 뒤집어쓰고 출발선에 섰다.
날씨는 구렸지만 참가자들 모두 본격적인 가을 시즌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흥분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모처럼 전날 푹 자고 일어난 나도 가볍게 출발했는데 다행히 같은 동호회의 선배 마라토너 두 명과 같이 뛰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랜 주력을 가진 50대 후반의 내 또래 남성들로 유쾌하고 지루하지 않게 시종 레이스를 이끌어 주었다. 두사람은 몸이 예전같지 않아 연습량이 충분치 않았고 체중이 좀 불었다면서 엄살을 내면서 속도를 5:30에 맞추어 뛰었는데 그 속도는 나도 평소에 뛰던 속도라 같이 뛰기에 좋았다. 다만 이들은 풀코스였고 나는 32km 코스여서 내가 후반부에 5km 먼저 반환점을 돌아서 골인하고 이들은 10km를 더 달린 후 돌아오는 것으로 42.195km를 채웠다.
공주의 풍광은 좋았어야 했지만 모든 것이 비와 안개에 가려서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산세는 없었고 공주 시민들의 응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고만고만한 업힐과 다운힐이 나올 때마다 두 선배는 오버페이스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었고 그러다가 큰 업힐 두 개를 넘고 다시 돌아와 종반부에 들어섰다.
우리 동호회는 28인승 우등버스를 대절해서 동탄에서 출발했는데 만석이었고 뒤늦게 참가한 회원들은 개인차량으로 대회장에 찾아왔다. 나는 이날 새벽 4:30에 일어났는데 전날 10시가 되기 전에 잠이 들었으니 무려 7시간 가까이 숙면을 했다. 대회를 앞두고 이렇게 잠을 잘 자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동탄보건소 앞에서 5:30 집결인데 전날 짐은 다 싸두었고 아내가 전날 밤 지어 놓은 찰밥과 조미김, 김치로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대회 전날 아내는 팥을 넣은 찰밥을 미리 해서 냉장고에 두는데 이른 시간이지만 이렇게 한 공기를 비우고 가면 달리기를 할 때 속이 든든하다.
이동시간은 한 시간 반쯤 걸렸는데 차 안에서 생수를 몇 모금 마셨다. 대회장 도착 후 경기복으로 갈아입은 후 짐을 맡기고 몸을 풀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스타디움 처마 밑에서 미리 잘라 온 스포츠테이프를 무릎에 붙였는데 습도가 높고 무릎도 살짝 물기가 있어서 제대로 안 달라붙었고 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 떨어졌다.
평소 하던 대로 스트레칭을 하고 우비를 쓴 채로 경기장 트랙을 두 바퀴 뛰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경기 시작 전에 몸을 푼다고 1, 2킬로씩 뛰는데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체력을 아껴둬야 할 것 같아서 늘 조금만 뛰고 만다. 식전 행사와 미녀들의 단체 체조 리딩을 구경하며 대회 측에서 제공한 아미노바이탈 뚱뚱이 젤을 먹었다. 이날 나는 주머니와 뒷 허리춤에 지퍼백이 있는 운동복을 입었는데 에너지젤 4개를 갖고 뛰었다. 8km마다 하나씩 먹었는데 막판에 필요를 느끼면 먹으려고 여유분으로 갖고 있었던 나머지 하나도 30km쯤에서 먹었다.
새벽 네시 반에 찹쌀밥을 한 공기 먹었지만 한 시간 반을 버스로 이동했고 9시 출발 시간까지 계속 몸을 움직여서인지 출발 직후 약간 배고픔을 느꼈었다. 급수대와 스펀지는 5km마다 나왔지만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갈증이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급수대를 한두 번 건너뛴 것 말고는 물을 꾸준히 한 모금씩 마셨고 후반부에는 바나나도 한 조각 먹었다. 바나나 한 개를 두세 조각낸 것으로 한입 크기였지만 달리면서 먹어야 해서 작은 조각으로 입속에 넣고 우물우물 먹었는데 풀코스든 하프든 달리면서는 이제껏 뭘 먹는 게 익숙지 않았다. 지난주 철원 대회에서는 올해도 10km 지점을 넘어서자 빙과류를 제공했는데 작년에는 맛나게 하나를 다 먹으면서 뛰었지만 올해는 두어 입 베어 물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서 나와 같은 속도로 뛰던 다른 주자들처럼 길에다 버리고 갔었다. 그런데 그 작은 바나나 한 조각은 놀랍도록 달콤했고 분명 기분 탓이겠지만 눈이 밝아지고 쳐졌던 기운이 차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굵어진 빗속의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 골인지점인 경기장으로 내달렸다.
30km 지점을 지났고 내 애플와치도 남은 구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알리고 있는데 골인 아치가 보이질 않았다. 이쯤이면 보일 때가 됐는데 하면서 달리는데도 한참을 안보이더니 마지막 커브를 돌자 곧바로 결승점이 나왔다. 그렇게 32km를 마쳤다. 마지막 2km 구간쯤에 좀 쳐졌다고 생각했는데 기록은 이전 구간과 별 차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2:55:22
기대 이상이었다.
이 성적이라면 가을 메이저 대회인 JTBC마라톤에서 서브 4의 가능성이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두 선배가 이끌어 준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다. 오른쪽 허벅지 중간 부분에 뻐근한 느낌이 좀 들었고 싱글렛이 아닌 반팔 티셔츠를 입고 뛰었는데 세 시간 동안 젖은 옷이 피부와 쓸려서인지 양쪽 겨드랑이가 빨갛게 충혈되었고 쓰라렸다. 너무 배가 고파서 메달과 함께 받아 든 간식 봉지 속의 빵을 허겁지겁 먹으며 맡겨 둔 짐을 찾고 젖은 몸을 닦았다. 몸이 식기 전에 실내 체육관 건물 안에서 스트레칭으로 발목과 무릎, 허벅지, 허리, 어깨, 목을 차례차례 풀었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스타디움 중앙 관중석에 앉아서 나머지 간식을 먹으며 방금 마친 달리기 기록을 찬찬히 점검했다. 작년에는 여름 내내 훈련한 결과가 가을에 별로 티가 나질 않아서 의아했고 기분도 별로였는데 올해는 확실히 기량이 향상된 것이 느껴졌다. 숫자로 된 기록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내 몸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막판까지 힘을 남길 줄 알았고 남은 힘을 결승에 쏟아붓는 느낌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결승에서 고꾸라지듯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달리던 가속의 리듬으로 웃으면서 힘차게 골인했다. 늘 바랬던 것처럼 즐거운 대회와 기쁜 골인이 된 것이다.
풀코스 주자들이 마저 들어오고 개인 정비를 마치자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가서 정말 맛있는 삼겹살과 밥을 먹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 주자들은 소주와 맥주로 축배를 들고 각자의 소감과 무용담을 주고받았다. 잘 구운 돼지고기로 배를 채우고 다른 이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나는 공깃밥과 찌개를 주문해서 달리는 내내 주렸던 배를 채웠다.
이렇게 가을 시즌이 즐겁고 기분 좋게 시작됐다. 남은 대회인 서울레이스, 경주 하프, 서울 풀코스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