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DNS, 날아가버린 <2025서울레이스>
올해(2025) 추석 연휴는 무려 열흘 혹은 그 이상.
그 연휴를 앞둔 나는 별 감흥은 없었지. <철원 DMZ 평화마라톤>과 <공주 백제 동아마라톤>으로 올 가을 시즌이 시작되었으니 연휴 내내 달리고 먹고 컬린 맥컬로우의 <시월의 말>을 재밌게 읽어야겠다는 생각 정도.
연휴가 시작하기 전날이었던 목요일엔 오후 늦게 수업이 있어서 보통은 아침에 뛰고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학교를 가는데 이날은 하루 안 뛰고 쉬었지. 전날까지 매일 새벽에 뛰고 하루 종일 수업하고, 그 사이사이에 수시 입시 학생부전형 심사하느라 벌써 며칠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힘들게 지내서 하루 숨좀 돌리자는 마음이 들었거든. 매일 뛰다가 하루 쉬면 '아, 쉬니까 좋다'는 생각보다는 '안 뛰니까 찜찜하네'라는 기분이 드니 이제 어느 정도 초보티는 벗어난 러너인가 생각이 들더구먼.
한가롭게 신문도 보고 느긋하게 있다가 점심을 먹는데 며칠 전에 주문해 놓은 가방 바퀴가 눈에 띄었어. 여행용 가방 바퀴가 망가져서 가방을 새로 사야 하나 했는데 AS에 문의하니 다행히 바퀴만 따로 팔더라고. 망가진 바퀴는 한 개였지만 네 개를 다 바꾸는 게 낫다고 해서 학교 가기 전에 조립을 하자고 맘먹었지.
설명서와 가방을 열어보니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어. 문제는 가방 바퀴가 가방의 구석진 네 귀퉁이에 있다 보니 각바퀴에 두 개씩 조여진 볼트를 풀고 바퀴를 빼낸 뒤 새로 주문한 바퀴를 끼운 뒤 다시 볼트로 조여야 한다는 거지. 좁은 부엌 베란다 바닥에 큰 여행 가방을 펼쳐놓고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일을 한 것이 화근이었어.
아내라도 옆에 있었다면 불편한 내 작업 모습을 보고 한마디 거들었을 텐데 공교롭게 며칠 전 등교하다가 발목을 삐끗한 아내는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병원에 갔는데 발목골절이라는 진단을 받고 깁스를 하고 출근을 못하다가 마침 이날 긴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하던 업무를 마무리해야 한다면서 출근을 했던 거지.
이런 간단한 일을 시작하면 한 번에 끝내지 중간에 쉬었다가 하지는 않아. 아기 손바닥만한 바퀴 네 개 교체하는 일, 볼트 여덟 개 풀었다 조이는 일인걸.
하지만 그 간단한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20분가량이 걸렸고 마지막 바퀴를 조립하고 일어서자 심상치 않은 통증이 허리에 느껴졌어.
극심한 통증은 아니지만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증상.
몸으로 느껴지는 내 몸의 구부정한 각도는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느껴져서 나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도 허리는 눈에 띌 정도로 앞으로 숙여져서 걷기에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았지. 조립을 마친 여행가방을 번쩍 들었지만 통증 때문에 허리를 세울 수가 없어서 간신히 아이 방에 갖다 두고 침대에 살살 누웠지. 그렇게 잠시 쉬었어, 호전되기를 바라면서, 일시적인 증상이기를 바라면서.
느낌이 좋지 않았어.
똑바로 누워도 허리가 완전히 펴지지 않았고 살살 달래 가며 허리를 펴서 등을 침대에 기대고 그대로 쉬었지. 그때 휴식을 제대로 가졌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학생들의 과제 발표가 있는 그날 전공 수업을 하지 못하면 유례없이 긴 연휴 덕에 목요일 수업은 2주 연속 못하게 되고 그러면 연휴 뒤에 있을 중간고사에도 영향을 미쳐서 일이 많이 꼬이게 된다는 생각을 했지. 그 수업은 수요일에 있는 수업의 세번째 분반이어서 이 수업들은 진도를 같이 유지해야 하거든.
천천히 일어나서 운전을 하고 수업을 하고 다시 운전을 하고 돌아왔지.
왕복 세 시간을 운전하고 또 세 시간 수업을 했다는 얘기야. 수업 내내 허리가 아팠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에 일일이 코멘트도 해주고 다음 과제에 적용해야 할 지침도 주어야 해서 여느 수업보다 집중도가 높았어.
실기 수업이라 일단 시작하면 아픈 것도 잊고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또 학생들과 토론하다 보면 유쾌해져서 잠시 동안은 다른 일들을 다 잊어버리거든. 그리고 그날 학생들이 다른 분반에 비해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팀이 적지 않아서 신경을 좀 더 써야만 했어. 컨디션이 좋은 날이었어도 막판엔 피로가 쌓였을 쉽지 않은 날이었을 텐데 수업을 마치고 고속도로에 오르니 벌써 연휴를 맞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더군.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집에 도착했는데 이런 날은 주차 공간도 여의치 않아서 더 피곤하게 했지.
정말 힘들어서 죽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계속 쉬었어.
뭐 연휴가 시작됐으니 마땅한 병원을 찾기도 어려웠을 거야. 허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할 정도도 아니고 응급실을 갈 상황은 정말 아니었는데 그냥 허리를 펴지 못하는 불편한 상태. 앉아있거나 누워있으면 괜찮지만 한번에 일어서기가 쉽지 않고 일어서도 뭔가를 붙잡지 않으면 허리에 힘이 들어가서 결국 앉을 곳을 찾게 되는 그런 증상. 그리고 그런 내 곁엔 발목에 깁스를 하고 나만큼이나 움직임이 어려운 아내가 있었지. 그래도 움직임이 가능한 내가 집안 곳곳을 다니며 환기도 시키고 비가 오면 창문도 닫고, 배달 음식이 오면 받아서 먹고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도 갖다 버리고...
달리기는 당연히 시도해 볼 생각도 못하고 우리 부부는 연휴 내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지냈어. 그러면 허리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핫팩으로 허리에 온찜질을 하고 허리가 아프다 싶으면 하루에 몇 차례 누워서 휴식을 했고 그 외에는 책을 읽거나 아내와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는 것으로 연휴 열흘을 근신했지.
그랬으면 나았어야 한다고 생각해. 무려 열흘을 얌전하게 집안에서 지냈는데.
연휴 막바지 한글날, 허리를 다친 지 여드렛날인데 비가 오지 않아서 가까운 트렉으로 조깅을 하러 나갔지.
이젠 허리가 조금 펴지고 걸음도 많이 자연스러워진 상태였어. 그런데 달리기를 하려니까 땅을 딛는 발에서 오는 진동이 허리를 울리며 통증이 생기더구먼.
아, 아직 안되는구나. 그래서 트랙을 걸었지.
걷는 것도 쉽지 않았어. 한 바퀴 300미터를 돌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참담했지.
그렇게 이틀을 더 쉬면서 마음속이 복잡해졌어.
연휴끝자락 10월 12일 일요일 <서울레이스> 하프코스 대회에 참가하기로 되어있었거든.
2년 연속 참가하는 이 대회는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서울 도심 달리기인데 종로 을지로를 오르내리다가 출발점인 시청으로 골인하는 서울 강북 도심 지역 달리기 코스로 내 젊은 시절 추억이 담긴 동네를 달리는 거라 나에게는 각별한 애착이 가는 대회지. 10월 2일에 다쳤으니까 나는 설마 이 대회 전에는 몸이 다 나을 줄 알았지. 그런데 대회를 하루 이틀 앞둔 시점에 몸 상태를 보니 많이 좋아졌긴 했지만 뛸 정도는 아니었어. 오랜만에 짐에 가서 트레드밀에서 달려봤는데... 달려지지 않더라고. 겨우겨우 5km를 걷다가 뛰다가 내려왔거든.
대회 전날, 대회에 입을 쇼츠와 싱글렛, 배번호와 에너지젤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착잡했지.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갈 수 있을까. 아내는 당연히 말렸지만 내 생각에는 걷다가 뛰다가 하더라도 하프 거리는 감당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러닝화를 고르다가 다시 허리에 통증이 와서 아무거나 집어 들고 가방에 넣었어. 우울...
그리고 대회 당일.
안 갔지.
못 갔지.
네시에 알람이 울었는데 그전에 깨서 침대에서 이리저리 몸을 굴려봤는데 몸이 어제보다 좋아진 느낌이 들었어. 당연하지. 밤새 누워서 잤으니 허리가 나아졌겠지. 하지만 일어나서 그 몸을 이끌고 시청 앞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찬바람 맞으며 대기하다가 21킬로를 달리고 오면 나으려던 허리는 더 악화될 것 같은 확신이 들더라고. 그러면 이번 주 토요일 경주 마라톤에도 참가를 해야하는데 그것마저도 뛰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고 결국 올 가을 메이저 대회인 JTBC 풀코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겠지.
그래서 그냥 더 누워서 잤어.
DNS. Did Not Start. 나의 첫 DNS야.
잘 한 결정이라고 믿고 싶어. 다행히 몸이 좀 좋아진 느낌이어서 오늘내일 살살 조깅을 해봐야겠어.
앞으로 6일 남은 경주마라톤은 제대로 뛰어야지.
시작은 여행가방 바퀴 네 개를 교체하는 것이었는데 긴 열흘짜리 연휴를 통째로 날리고 <서울레이스> 대회까지 포기하게 만든 이번 허리 부상.
나는 크리스천이야.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지. 아내는 그랬어. '이제 달리기는 좀 살살하고 나를 좀 쳐다보렴'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실까라고.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마라톤 대회는 늘 교회에 가야 하는 일요일에 열려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대회날이면 당연하다는 듯이 예배를 빠졌으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대회 참가를 하지 말아야 하나.
그건 아닐 테고 내 마음이 중요하겠지. 그동안은 너무 달리기에만 몰두해 있었던 마음을 크리스천이라는 내 정체성을 찾고 달리기는 그 후에 생각해 볼 일이겠지. 생각해 보니 오늘 포기한 서울레이스는 일요일 대회인데 이번 주 경주 마라톤은 토요일 대회라 예배 참석에는 지장이 없겠어.
분명한 건 내가 달리기에 빠져있느라 그동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좀 방치해 두었던 것은 맞는 것 같아. 아픈 허리가 조금씩 회복되는 것처럼 나도 다시 한번 내 주변을 돌아보자.
달리는 기쁨에 취해 소홀했던 내 주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