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JTBC 서울 마라톤
3:30 결국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열 시가 조금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잠을 청하는데 실패했고 밤새 뒤척인 것이다. 몇 주전에 있었던 경주 마라톤 32K 때는 같이 뛰기로 한 일행 셋이 하루 전날 가서 냄새나고 지저분한 모텔에서 뒤섞여 잤지만 깊은 잠을 자고 피로가 말끔히 가신 후에 대회에 임했었다. 당연히 기록도 좋았고 주력이 오래된 내 또래 클럽 회원들이 잘 이끌어줘서 경기 운영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지난 경기일 뿐, 오늘은 몸이 무겁다.
경기 복장으로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외투를 입어서 도착하면 탈의실에 갈 필요 없이 복장을 챙겼다. 아내가 전날 밤에 지어 놓은 찰밥 한 공기를 천천히 먹었다.
5:00 클럽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상암으로 출발했다.
올해 마지막 메이저 대회라 참가자가 많다. 작년에 40km에서 쥐가 나서 쓰라린 DNF 경험이 있는 나는 더 조바심이 난다.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무난하게 서브 4 달성을 예측했었으나 추석 연휴 시작 즈음에 허리를 다쳐서 3주 가까이 몸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허리가 좀 나아지자 오른쪽 발목을 접질려 대회 포기를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아직 완주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뛰다가 발목이나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언제라도 경기를 그만 둘 생각이다.
6:20 상암 도착 후 단체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날씨가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여명 속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마라토너들로 경기장과 주변 도로는 이미 몸을 부딪히며 걸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두툼하게 입고 온 겉옷을 벗고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이 되었다. 선글라스와 모자, 암 슬리브와 에어지젤 등을 챙기는 등 경기 복장만 남기고 휴대폰과 가방을 맡겼다. 선수들이 맡긴 짐들은 경기 도착 지점인 올림픽 공원으로 이송될 것이다. 짐 맡기는 곳 옆으로 간이 화장실들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상암 경기장 맞은편의 농수산물센터로 우르르 몰려갔다. 따뜻한 실내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화장실에서 속을 비워내야 했다.
7:30 D조 출발 대기선.
서브 4가 무난한 여성 회원 S와 같이 뛰기로 했다. 5km마다 내 페이스를 계산한 기록을 팔목띠로 만들어 오른손에 차고 왔지만 누군가 그 정도 속도로 함께 뛰어주면 큰 도움이 된다. S는 평소 연습량도 적지 않았고 속도도 믿을만해서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두 명 더 같이 뛰면 좋을 것 같아서 역시 즉흥적으로 50대 남성회원 H와 R에게 제안했더니 좋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나는 이 두 사람이 웬만큼은 뛰는 줄로 알았다. 우리가 함께 뛰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곁에 있던 S의 눈빛에 약간 망설임의 느낌이 있었다. 출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던 무렵, 세 명의 아저씨에게 둘러쌓여 뛰어야 할 운명의 S에게는 도망가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S는 스르륵 사라졌고 나는 H와 R 등 신뢰할 수 없는 실력의 50대 남자 두 명과 함께 뛰게 되었다.
8:10 D조 출발.
조별로 분산시키고 풀코스와 단거리 코스를 분리시켜 출발했다지만 초반 3km쯤은 6:00 이상으로는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초반 5km쯤을 5:40으로 달리면서 몸을 풀다가 길이 넓어지고 병목이 완화되면 5:20으로 나머지 코스를 달려서 서브 4를 하기로 했다. 42km를 달리는 작전치고는 너무 엉성했고 이마저도 초반에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6:00 속도로 느려지자 늦춰진 속도를 만회하고자 성급하게 피치를 올렸고 한번 올린 속도는 내리막길을 만나자 막힘없이 5:00까지 내달렸다.
9:10쯤 약 12km 지점 통과.
그전부터 나는 속도가 빠르다고 얘기했지만 두 사람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오르막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에 시간을 벌어두어야 한다는 계산. 속도가 5:00대에 이르자 나는 다시 한번 '너무 빨라요'를 외쳤고 역시 묵살됐다. 이런 동행이라면 사실 나는 그들을 먼저 가도록 내버려두고 내 페이스대로 뛰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출발 전에 내가 불러 모은 그룹이었고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나도 혼자 뛰기보다는 동행이 있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종로에 들어서자 호흡도 안정권으로 자리 잡았고 무엇보다도 중간에 소변을 보느라 멈추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매번 풀코스에서 화장실을 들르느라 시간도 뺏기고 화장실을 찾느라 두리번거려서 경기 집중력도 흐려졌었는데 오늘은 끝까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10:30쯤 약 25km 지점 통과.
춥지 않은 날씨에 전날 내린 비로 습도도 적당해서 이제까지 풀코스 날씨로는 최상급이었다. 다만 이제껏 선선하게 불어주던 바람은 강풍으로 변해서 한강이 가까워오자 모자를 잡고 뛰어야 할 만큼 몰아치기도 했다. 이제까지 매 5km마다 나타나는 급수대에서 빠뜨리지 않고 한 모금씩이라도 물을 마셨다. 8km 간격으로 에너지 젤을 꺼내 먹었고 경기 시작 전에는 대용량 에너지젤을 먹었다. 이 지점쯤에서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H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이 뛰던 우리보다 앞으로 치고 나가서 7분 정도 먼저 골인했다. 풀코스 경험이 많아서인지 R과 내가 겪었던 후반 뒷심 부족 증상이 적었던 것 같다.
11:30쯤 35km 언저리.
잠실 대교를 건너기 전부터 속도가 6:00대로 주저앉았고 속도만이 아니라 피로감도 심해졌다. 코스는 작년과 비슷해서 눈에 익은 길들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름 내내 가을 풀코스를 생각하며 견뎌냈던 훈련을 떠올렸다. 더위를 피해서 인도네시아 고지대로 가서 새벽마다 뛰던 일정들. 몸도 자신감도 가을 대회를 위해서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두었지만 복병처럼 찾아온 허리 부상과 발묵 부상은 이 모든 훈련과 준비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완주만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실낱같은 서브 4 목표를 내려놨다. 힘겹게 쫓아오던 R이 뒤로 쳐지더니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10분 쯤 늦게 골인했다.
12:25 경 골인.
공인 기록 4:16:02.
서브 4는 쉽지 않았다. 하프나 32km를 달리고 난 기록은 나의 풀코스 예상 기록을 모두 서브 4라고 했지만 경기 전에 찾아온 부상과 경기 당일의 컨디션을 염두에 두고 내린 예측은 아니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메달과 간식을 받고 맡겨 둔 짐을 찾았다. 클럽에서 골인 지점인 올림픽 경기장 한편에 부스를 설치하고 미리 주문해 둔 도시락을 줬지만 역시 먹히지 않았다.
풀코스를 마친 후에는 늘 식욕이 없었다. 대신 500ml 이온음료를 두 병 마셨고 그때까지 참았던 오줌도 시원하게 누었다. 클럽에서는 오늘 첫 풀코스를 뛴 사람, 서브 3, 서브 4 기록자들에게 시상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단체사진을 찍고 동탄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올봄 동아마라톤을 마치고 난 직후부터 준비한 제마가 끝이 났다.
허탈했다.
충분히 서브 4를 할 수 있었는데 컨디션 난조와 경기운영 미숙으로 날렸다.
장거리 훈련과 인터벌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과 대회 당일 컨디션 난조가 우선적인 개선 사항으로 생각된다.
한 해가 간다.
원하던 기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뛸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그리고 기쁘게 뛰었다.
즐거운 달리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