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의 고백

20살에 죽겠다던 저는 결국 살아가기로 했어요

by 찬류

20살, 그것이 내가 정해놓은 내 생의 마지막이었다.


고등학교 생활을 지나 졸업하는 1월 1일에, 나는 죽기로 했다. 실패만 가득한 삶이었고, 부끄러움만 가득한 인생이었으니.

성인이 되는 1월 1일에 죽기로 한 이유는 별거 없다.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무서웠다. 어린 나의 삶에서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짐이 더해질 성인의 삶은 상상만 해도 무거웠다. 20살은 어린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의 마지노선이었고, 모든 자유와 의무가 오롯이 내 것이 되는 순간 택할 첫 선택지는 바로 외면과 죽음으로의 도피였다.

집 이곳저곳에 상비약으로 있는 수면제를 야금야금 챙겼다. 내가 먹던 약도 마지막 순간을 위해 한 봉지에 모아두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본 건 있어서,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손길은 담대하고도 어리석었다.

우습게도 삶의 마지막을 정해두자 무채색이던 삶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당연하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겼다. 게슈탈트 붕괴라도 온 듯 모든 것을 새롭게 여기고 처음 접한 것처럼 행동하자 누군가는 나에게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했다. 가장 아파하던 것에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내 속내도 모르고 가시처럼 박혀 들게 하던 누군가의 편한 말들도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흘려들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나는 가장 병들어 있던 시기에 가장 건강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아보려고 해도 절대 그때만큼은 할 수 없다. 왜 지금도 안 되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가능했는지는 아직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쨌건 지금은 살아있고,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어찌 닮을 수 있겠는가.




이번 어버이날은 제대로 챙겨보기로 했다. 동생을 채근하여 동네의 다 있는 곳에 들렀다. 동생과 이게 더 낫네, 저게 더 낫네를 따지며 편지지를 골랐다. 편지를 고른 후에는 빵집에 들러 케이크를 샀다. 나름 신경을 쓴답시고 브랜드의 스테디셀러를 골랐다. 두 손 무겁게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있었다. 당황한 우리는 신발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엄마와 대치 상태를 이어 나갔다.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냐며 화를 내시려던 엄마는 우리의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보고는 어색하게 한 마디를 꺼내셨다.

“나 다시 나갔다 올까?”

이미 들킨 거 조금 더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동생에게 숙제하라고 재촉하시는 엄마를 편지를 써야 한다는 말로 막았다. 각자 방에 틀어박힌 우리는 아빠가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했다. 우선 케이크를 김치냉장고 속에 숨겼다. 빠르게 머리를 쥐어짜내어 필사적으로 예쁜 글씨를 깎아냈다. 동글동글한 글씨로 써 내려간 편지 속에는 몇 년 만에 내비치는 나의 진심이 묻어있었다.

편지를 썼던 당사자는 담담하게 써 내려가야 보기에 그림이 괜찮았을 텐데, 나는 꼴사납게도 몇 번이고 눈시울을 붉혔다. 울컥하는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드리며 흔들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 글씨를 써 내려갔다. 편지지 양쪽을 빼곡하게 채우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척 보아도 횡설수설한 것이, 수정 테이프를 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빠가 퇴근하셨다. 김치냉장고를 열어보셨는지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다정한 고맙다는 한마디가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다가도 깜짝 파티의 계획을 들켰다는 것이 못내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파티는 화목하게 진행되었다. 거실에 가족이 모이고, 케이크를 꺼냈다.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동생과 나는 편지를 건넸다. 내 편지는 아빠가 먼저 읽으셨다. 다정하시지만 감정의 폭이 그리 크지 않은 아빠였는데, 먹먹해지신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편지를 읽으셨다. 내 편지를 다 읽은 아빠는 말없이 동생의 편지를 보고 와하하 웃으시는 엄마와 편지를 교환했다. 엄마 또한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이 슬금슬금 배어 나오려고 했다. 내가 엄마나 아빠와 같은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했기에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행복해진 시간을 더 이상 그런 것들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 아픔을 견디고, 딛고 일어나 결국 새로운 해결 방법과 행복을 찾아낸 것이니까.

엄마는 내가 19살일 적, 수능을 본 후 20살이 되는 1월 1일에 죽겠다며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나에게 담담히 말씀하셨다.

‘그래.’

그때는 그저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편안함만을 느꼈는데, 살아간다는 결정을 한 후 죽음의 무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 본 지금은 그때 엄마의 심정이 어땠는지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20살에 죽겠다는 너를 그냥 두고 봐준 자신에게 평생에 걸쳐 큰 효도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힘차게 외쳤다.


엄마는 그제야 웃음을 걸치고 나를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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