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었다 줄었다

몸무게는 늘기만 하는데

by 찬류

가끔 나에게 문제를 낼 때가 있다. 아침에 4개, 점심에 2개, 저녁에 3개인 것은?

바로 내 약 개수... 푸하하.




“이대로라면 약이 줄어들 날도 올까요?”

“물론이죠, 생각보다 금방 올 것 같은데요?”

물론 나의 약 개수는 아침에 4개, 점심에 2개, 저녁에 3개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이 양이 다른 환자들에 비해 많은지, 적은 지... 어쩌면 정확히 평균인지는 비교하기 어렵다. 그전에 관심도 없다.

나는 아침에는 ADHD 약을 비롯한 각성 효과를 주는 약을 먹고, 자기 전에는 진정 효과를 주는 약들을 먹는다. 그렇게 약을 먹어온 지도 벌써 n 년, 나에게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겼느냐? 그렇게 묻는다면... 지금은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어렵다.


“버스만 타면 손이 축축해져요.”

이 말에는 약이 추가되었다.

“이제는 소극장에서도 연극을 볼 수 있어요.”

이 말에는 약이 줄어들었다. 보통 반 알 정도.


처음 약을 먹었을 때에는 뇌가 재조립되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지금까지의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더랬다. 평생을 걸쳐 나 자신과 싸워왔고, 매번 나 자신에게 패배하면서 나는 안 되는 놈이라며 자책하고 우울해하기를 반복했는데, 이 모든 것이 약 한 알로 해결되는 것이었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뭐였을까. 내가 나아가려 몸부림치던 나날마저 망가져있던 뇌와 호르몬의 농간이었나.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무엇이지? 약을 먹자마자 달라진 나의 모습에 긴 어둠 속에서 정답을 찾은 것처럼 좋아하시던 엄마아빠와 다르게 나는 꽤나 씁쓸한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뭐, 그건 그때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약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안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시스템의 도움을 받았던 저렙을 지나 스스로 전략을 짜야하는 중급 레벨에 들어섰달까.


시작은 호르몬이었을지 몰라도 반복으로 다져져 결국 습관으로 자리 잡은 나의 생활양식은 약으로도 쉽게 고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어질러지는 방이라던가, 짧은 집중 시간, 체계적이지 못한 계획 같은... 흔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특징’ 말이다.

이러한 것에 의사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면 ‘그것은 훈련의 문제다’라고 따끔하게 이야기해 주시기도 하고, 고민을 하시다가 약을 조정하시기도 했다. 내가 봤을 때는 ADHD 관련은 이제 약에게만 의존해서는 제자리걸음일 것 같고, 공황장애만 약이 잘 듣기를 바라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ADHD는 약을 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기억력이 좋아진다거나, 지능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루틴에 갑작스럽게 추가되는 것이라던가, 늘 수행하던 루틴이 깨져버리는 경우에는 그것들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나는 약을 먹는 것이 그랬다. 공황 발작이 너무 심해 점심 약을 추가로 처방받았을 때에는 갑작스럽게 추가된 루틴을 수행하기 어려운 와중에 까먹은 것을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공황 발작이 눈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약을 먹지 않고 사과 한 조각이라도 집어먹어 루틴을 깨뜨리는 날에는 공황 발작이 찾아올 때까지 아침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특히 내가 나를 통제해 보겠다며 작성하겠다 마음먹은 자기 관리 노트는 루틴으로 자리잡지 못해 작성 텀이 2달을 넘어간다.


그럼에도 내가 이만큼 해냈다!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점심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아침 약을 조금 늦게 먹어도 공황 발작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저녁 약은 한눈에 셀 수 있을 정도로 양을 줄였다는 것!

와, 늘어놓고 보니 많이도 이루어냈다.


약이 줄어들 때마다 집에 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바로 부모님께 메시지를 보내던 때를 기억한다. 좋은 소식이 있다며 곧 병원에 가는 주기가 2주에서 3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하던 감각을 기억한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의 성취감이나 뿌듯함보다는 부모님의 반응이 더 중요해서, 약이 늘어난 날에는 죄인이 된 것 마냥 최대한 늦게 소식을 전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나는 이제 습관을 노력으로 바꾸어야 하는 레벨에 도달해서, 조금 더 애쓰고 고생해야 하는 시점이다. 대신해 보기도 전에 안 된다며 울 필요는 없어졌다. 이제는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물론 습관의 영역에는 내 기본적인 마음가짐도 있기 때문에 작심삼일을 여러 번 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깨달았다고 해도 내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다른 영역이거니와,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쪽인 공황장애는 이제 안정권에 들어섰으니, 조금 더 과감해져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바깥에 나가는 연습도 몇 번 해보니 이제 바깥바람을 쐬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흉통이 무섭지도 않다. 익숙하게 약을 찾아 먹고 운동기구 위에서 기지개를 켜 가슴을 열어주면 되는 일이다.




약을 먹는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도 많지만, 나는 약 한 알만으로(물론 지금 내가 먹는 것은 단 한 알이 아니긴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을 체감한 사람으로서 그리 나쁘게 볼 일은 아니지 않나 싶다. 오히려 먹지 않는 사람이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일단 먹는 사람은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이고 실제로 나아지는 중인 사람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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