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말이지

그럴 이유도 없는데

by 찬류

“감정 조절이 미숙하다는 것이 느껴져요.”


의사 선생님의 타자 소리가 조금 길어졌다. 혹시 문제가 있는 걸까,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선생님은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공황이 안정된 것 같아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역시 ‘그럴 수도 있는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 현상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 먹는 약으로도 충분히 해결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처음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늘 억누르던 감정이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흘러나오다 못해 범람하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 기억난다. 늘 감정에 목줄을 채워 끌고 다녔던 내가 치료를 기점으로 끌려다니게 된 기분에 치료가 내게 맞지 않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도 해본 적이 있었다.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나오고 웃음이 나왔다. 눈물과 웃음이 고갈되자 남은 것은 분노였다. 갈 곳 없는 분노가 갑자기 내 가슴을 뜨겁게 태우고, 종래엔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향했다.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전부 적으로 느껴지며 더 이상 그들 앞에서 웃지 않겠다고, 연을 이어나가지 않겠다고 섣부른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감정에 지배당하는 이성을 가지고도 나는 결국 나라서 뒷일을 걱정했다.

‘이딴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거지?’

‘이런 상태로 내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건강하지 않은 정신으로 건강하지 않은 생각을 하며 나는 점점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은 최고의 약이라는데, 몸뚱이는 아직 나에게 너는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정의를 수정하기에 넌 아직 너무나 미숙하다고 이야기한다.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도 어렵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나요?’

단호하게 ‘네’라고 체크하던 검사의 답은 달라졌으나, 여전히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아마 내 답답함의 원인은 여기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내 안의 분노는 아직 고갈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고, 상상 속의 나는 울부짖으며 욕설을 쏟아내고 있다.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지 특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이 분노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 물론 현실에서 그럴 자신도 없고. 그렇다면 역시 내 분노가 향할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무슨 죄인데?라고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우물쭈물거리다가 결국 분위기를 깰 법한 자괴감 가득한 말이나 꺼내둘 것이다. 결국 나는 상처 입힐 상대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만만했던 것이다.


나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성가시다. 사람은 이유를 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내가 왜 분노하는지, 왜 눈물이 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마치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는데도 울어버리는 신생아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신생아와 다르게 타인이 보호자가 되어줄 수 없다. 나의 보호자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또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나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입 안이 쓴데도 달콤한 것을 입 안에 쑤셔 넣거나, 쿵쾅거리며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버리거나. 나를 돌볼 여력이 없을 정도로 정말 지쳤을 때에는 나를 방치해버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던 멀리 본다면 그리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다. 당장 정신에는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몸에는 좋지 않은 방법이니까.


처음 치료를 시작했을 때에는 금방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대가 얼마나 가벼운 허상이었는지를 실감한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현상유지가 고작이니. 점점 내가 흐려지는 기분이다.

분명 그때보다 발전한 구석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치료를 시작함으로 내가 맞이할 뻔했던 최악의 미래를 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적당히를 모르고 지금 내 팔로는 닿을 수 없는 삶과 엉망인 당장의 나를 비교한다. ...악순환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가고 또 새로운 태양이 뜨면 늘 그랬듯이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정상을 표방하는 나 중에서 후자를 고르고는 마음을 기워가며 삶을 살아낼 것이다. 절어가면서도 결국 앞을 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 약과 치료의 효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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