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6.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

당연한 권리는 없다

by 채널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이 말을 못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보니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고, 서글픈 말이기도 하다.



호의(好意)란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좋게 생각하여 배려하는 마음이다. 누구나 상대방에게 이런 호의를 받아본 적도, 베풀어본 적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남에게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받은 배려나 호의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모두가 호의에 잊지 않는 마음을 갖고 산다면 너무 평화로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그 사람이 감사하게 생각하면 말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잊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호의를 보였다는 건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일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상대방의 친절한 마음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의 배려나 양보를 당연하게 여긴다. 역시 계속되는 호의는 상대방을 호구로 볼 수밖에 없나 보다.


난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못 낸다. 일하면서 싸우게 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제 목소리도 못 내는 답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대신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늘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그렇다고 착한 사람 또한 아니다. 긴긴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적당히 이기적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가면을 쓰고 있다. 어쩌면 호의를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 아 이거 일정 안에 못 맞출 거 같은데요"

오과장이 팀장에게 쩔쩔매며 말하고 있다. 오과장은 성격이 밝다. 너무 밝다. 사무실의 오지라퍼로도 소문나 있는 사람이다. 밝은 성격이지만 업무능력은 조금 어둡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안색이 어둡다.


"아, 저녁에 중요한 약속도 있는데.."

절망적인 목소리로 오과장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일을 하는 내내 한숨도 푹푹 쉰다. 그에게는 지금 던져진 일이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쩌겠는가. 본인이 할 일은 해야 할 것인데.


나는 점심을 먹고 오늘 해야 할 업무를 어느 정도 끝내놓은 상황이다. 퇴근 때까지 여유 있고 칼퇴가 예약된 상황이다. 나는 칼퇴 생각에 신나는 마음을 그만 얼굴에 그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과장은 나에게 죽는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오늘 업무 다 끝났어?"

"뭐, 어느 정도? 아주 없진 않지만.."

"그러면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진짜 미안해"



굳이 나까지 도와줘야 해?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초라하게 떨리는 그의 어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우리는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도 하나 더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번 한 번 도와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수월하게 끝나자 고맙다며 커피도 사줬다.


그 뒤로도 그는 잘 모른 게 있을 때면 내게 묻고는 했다. 팀장한테 물어보면 괜히 무시당할 거 같고, 아래 직원들에게 물어보긴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다. 난 그가 일을 잘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 둘 간섭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일 하는 내내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뒤, 또다시 큰 프로젝트가 생겼다. 각자 영역을 맡아서 했고 모두가 바빠질 상황이었다. 나 또한 긴장하면서 일을 해야 했다. 다들 일에 열중하느라 정신없는데 오과장이 또다시 말을 걸어온다.


"이 부분은 진짜 어렵다 그치?"

"아 그래? 나도 내 거 하느라 정신이 좀 없네"

"요 부분만 넘기면 진짜 알 거 같은데 좀 봐줄 수 없어?"


바빠 죽겠는데 물어오는 그가 살짝 짜증 났지만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과 함께 결국 도와주게 되었다. 그는 신나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일을 도와주다 보니 점점 내 일의 진도가 안 나가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그는 또다시 나에게 왔다. 역시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너무 잘 도와준 모양인지 이제는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다. 너무도 당연한 태도로 다가오니 나도 그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오과장, 이건 내가 못 도와주겠어. 나도 지금 일이 너무 많거든."


알았다며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입이 삐죽거려 보인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미안할 것도 없지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내 일을 해야 하니 어쩌겠나 싶었다. 그동안 많이 도와줬으니 그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다음날부터 그는 나에게 오지 않았다. 그 밝던 사람이 내 얼굴만 보면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다. 잡담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던 사람이 업무에 관한 얘기 말고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 하고만 히히덕거리고 있다.


어느 순간 이런 얘기를 들었다.

"그거 얼마나 된다고 오과장 좀 도와주지 그랬어"

그제야 나는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오과장은 내가 그동안 많이 도와준 건 다 잊었나 보다. 한 번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 못내 서운해 다른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그동안의 일을 얘기하며 오해를 풀었지만 오과장이 너무 괘씸했다.


역시 계속되는 호의와 배려는 상대방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는데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나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호구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호의를 베풀고 싶다면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를 돕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를 깎아가며까지 도와주지는 않겠다는 마음이다. 호의는 공짜가 아니다. 시간이고, 에너지이고, 마음이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써버리는 사람에게 계속 내어줄 이유는 없다.




한 번쯤은 도와줄 수 있다. 두 번쯤은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세 번째부터 ‘당연함’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호의는 성격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내 호의가 누군가의 권리가 되지 않도록, 오늘도 나는 조용히 선을 긋는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