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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안 XianAn 스님 Mar 18. 2024

무상선: 명상의 형태를 갖지 않는 지점까지 도착합니다.

한국에 와서 늘 받아온 질문입니다. 미국에서 무슨 명상법으로 수행하셨나요? 위빠사나인가요? 화두도 하시나요? 묵조선인가요? 사실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 '내가 하는 수행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질문을 듣고, 얼어서 대답도 못한채 머리만 긁적거렸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스승님인 영화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마스터, 한국에 갔더니 자꾸 사람들이 무슨 수행법으로 하는지 물어봤어요. 근데 저는 뭘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 결가부좌로 앉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행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영화 스님이 답하길, "그래. 그렇지. 대답을 못하는 건 당연한거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무상선이거든!"


사실 우리가 결가부좌 명상을 한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저는 개인적으로 결가부좌로 오래 앉는 걸 그리 잘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도전했습니다. 영화스님은 그 외에도 수많은 어려운 문제를 던져줬습니다. 그때마다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순간순간 나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도 선명상반 학생들에게 우선 결가부좌부터 연습하라고 시킵니다. 그것도 많은 시험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저는 학생들이 하고픈 의지와 용기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학생이 시험에 통과하면 좀 더 어려운 시험을 던져줍니다. 어렵고 힘든 시험을 겪을 때마다 더 열심히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걸 계속해야하는지, 포기해야할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잘 앉지는 못했지만 늘 노력했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다시 도전했습니다. 스승님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번뇌와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저에게 무슨 복이 있었는지 스승님은 많은 가르침과 기회를 줬습니다. 과정에서 수행의 진전을 얻었습니다. 전보다 강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본 질문으로 돌아가서, 위앙종에서는 어느 특정한 법의 문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본래 중국에서 '상이 없는 선'이라고 합니다. 즉 무상선(無相禪)입니다. 영어로는 ‘Markless Chan’이라고 합니다. 일본인은 ‘문 없는 선’ 즉 무문선이라고 합니다. 선화상인께서 미국에 가져간 선은 실로 무상선입니다. 무상선이 뭔가요? 예를 들어 선생님이 "명상할 때 호흡을 세보세요." 그러면 뭘까요? 무문은 법의 문이라고는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호흡을 세야 한다면, 어떤 법의 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문이라 불릴 수 없습니다. 대승선이 아닙니다. 또는 참선을 하는데, 반드시 화두만 해야한다면 뭔가요? 그것도 무문이 아닙니다. 수행하는데 화두에 의존해야하니까요. 만일 어떤 스승이 염불만 고집한다면, 어떤가요? 문이 없는 선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도 어떤 한 가지 수행법 즉 법의 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문선은 문이 없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어떤 방법도 아예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법의 문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결가부좌로 앉지 않아도 완전히 괜찮다는 겁니다. 만일 화두를 하고 싶지 않아도 괜찮아요. 진언을 외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어떤 특정 수행법 즉 법의 문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대학교에 간다면 학교를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학교에서 아마 박사과정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떤 학교를 갈지 골라야 합니다. 학업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니까요.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명상을 배우는데, 그 방법이 얼마나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 명확해야 합니다. 계획 없이 아무 학교나 막 가지는 않습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명상 지도자는 그것이 명확해야 합니다. 무작정 모르면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무튼 무문선은 "문이 없는 선"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어떤 특정 법문(Dharma Door)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건 모두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걸 배우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문선과 무상선은 뭐가 다르죠? 무상선은 수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우리가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보지도 못합니다. 겉으로는 빈둥거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고 명상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수행해서 더는 명상의 형태를 갖지 않는 지점까지 도착합니다. 그러니 그걸 무문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문은 아직도 "문이 없음"에 집착합니다. 정말로 "상이 없다"면 "나 그런거 신경 안 서. 더는 상관안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화두를 모릅니다. 염불 실력은 별로입니다. 그래서 영화스님 곁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왔습니다. 스승님의 지침에 따라서 결가부좌로 앉아서 아픈 것을 견디고, 단식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 만한 상황에 많이 쳐해보았습니다.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일들을 해야 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했습니다. 일하는 것도 선입니다. 앉는 것, 눕는 것, 걷는 것 그 모두 선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좌선이나 염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하는 것입니다.


*참고 법문: 영화 스님의 대승 법문 ‘모든 게 시험이다. 무상선’(2018년 4월 28일)

* 커버이미지 제공: 입안入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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