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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Dec 03. 2023

춥지 않은 겨울에 눈을 기다리며

글이 도저히 써지지 않아 쓰는 일기-2023년 12월 3일

글이 도저히 써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백지와 같은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다. 단어와 문장 정도는 떠오르는데 그것들이 서로 잘 연결되지는 않는다. 주제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도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나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이것은 큰 문제다. 나에게 ‘쓰는 일’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와 같다. 그런데 쓰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삶이 제대로 살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악을)듣거나 (글을)읽는 것은 그런대로 아직 괜찮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쓰는 것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나아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일기를 쓴다. 일기는 기록이므로 조금 수월하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텍스트로 옮겨 적으면 된다. 나에게는 필사와 비슷한 일이다. 그런 연유로 일기라는 형식을 빌어 쓴다. 사실 일기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주제 없이 아무 이야기나 하고 싶기에 하는 핑계에 가깝다.


일기답게 생각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꺼내자면, 미디엄 사이즈의 상의를 입던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라지 사이즈를 입는다. 옷의 사이즈라는 것은 묘하다. 나의 몸은 미디엄 사이 지를 입으면 미디엄으로 보이고 라지 사이즈를 입으면 라지 사이즈로 보인다. 옷 안에 들어있는 나의 몸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시각적 크기는 옷의 사이즈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전에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즐겨 입었다. 몸에 살짝 붙는 촉감, 그리고 그로 인한 약간의 긴장감. 그것이 좋았다. 의식이 팽팽해져 있으면 여러모로 효율이 좋았다. 일도 생각도 빨랐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몸에 잘 맞는 옷이 힘들어졌다. 잘 맞는 옷을 입고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넉넉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오늘 나는 옅은 회색의 라지 사이즈 집업 맨투맨을 입었다. 비슷한 색의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었다. 외투는 숏패딩을 걸쳤다. 몸통은 짙은 녹색, 팔 부분은 크림색이다. 역시 넉넉한 사이즈다. 그리 두껍게 껴입지 않았음에도 바깥날씨는 춥지 않다. 나는 조금 아쉽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춥지 않다. 눈도 잘 내리지 않는다. 아직 겨울의 한복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카페에 앉아 콜드브루를 주문했다. 커피다운 커피보다는 시원한 음료수에 가까운 액체가 필요했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개의 경우, 주말의 이 시간이면 나는 좋은 원두로 내린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그러나 오늘은 콜드브루다. 한창 일을 하는 평일의 점심 식사 후 시킬법한 커피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글도 잘 써지지 않으니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진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펼친다. 조금 읽다가 다시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음악에 집중해 본다. 그러다가 이어폰을 빼고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자갈거리는 얼음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 발걸음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크리스마스 캐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작도 없도 끝도 없는 글을.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콜드부르에 담긴 얼음이 다 녹지 않았다. 얼음은 얼음들끼리 서로 붙어 녹아내리지 않도록 냉기를 나누고 있다. 앞 테이블에 앉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아빠, 세 시간이 몇 분 인줄 알아? 180분이야.” 하며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아빠에게 말을 건넨다. 아빠는 고개를 들고 아이를 쳐다본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을 것 같다.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눈이 왔으면 좋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추웠으면 좋겠다. 그러며 눈이 내릴텐데.




일기를, 그러니까 관찰 기록에 가까운 글을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시 턱, 하고 막혀버렸다. 멈춰버렸다. 일기답게 생각의 흐름으로 시작해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조금씩, 하루씩 더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으로 홀연히 홀가분하게 일기를 마친다.



image : https://unsplash.com/photos/-tVm6pFQ0j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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