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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Dec 15. 2023

말만 하고 미루고 있는 것들

12월이 절반이나 지났지만 아직 쓰지 못한 휴가가 많이 남았다. 특별히 갈 곳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휴가는 모두 써야 하기에 평범한 금요일인 오늘, 나는 휴가자가 되어 거리로 나왔다. 평소의 출근시간보다 늦은 시간에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모습을 보고 한강이가 이상한 듯 쳐다보며 야옹야옹 잔소리를 했다.


가방에는 ‘타자의 추방’과 맥북을 챙겨 넣었다.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과 글을 쓸 수 있는 맥북이 있으면 어딜 가든 큰 상관이 없다. 어디든 앉을자리가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읽거나 쓸 수 있기만 하면 되다니, 나의 삶은 복잡한 듯싶다가도 이토록 간결하다.


사람이 많은 금요일 오후의 스타벅스는 꽤나 소란스럽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빌 에반스의 피아노를 듣는다. 이어폰을 꽂으니 사람들의 말소리는 구체적인 의미를 잃고 먹먹한 웅성거림이 되었다.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 웅성거리며 입을 뻐끔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좁은 이 공간이 수족관이라도 된 듯하다. 아무래도 좋은 수족관. 그 속에서 타자의 추방을 조금 읽다가,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꽤나 계획적인 편에 속해서 일을 미루는 일이 없다. 그런데 일이 아닌 것 중에 왠지 모르게 하겠다고 말만 하고 미루고 있는 것들이 있다. 특별히 하기 싫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미룬다. 잊는 것도 아니다. 머리 한 편의 ‘해야 하는, 아직 하지 않은 일’ 리스트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잊은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이 맞다.


우선 여름이 지나 더 이상 켜지 않는 선풍기 날개를 닦아야 한다. 선풍기 2개는 여전히 침실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분명하게 먼지가 쌓이고 있다. 선풍기는 깨끗하게 닦은 뒤 잘 말려서 커버를 씌워야 한다. 커버를 씌운 뒤에는 보일러실 한편에 넣어야 한다. 보일러실에 자리가 있어야 할 텐데. 가만, 선풍기 자리를 마련하려면 보일러실도 치워야 한다. 선풍기 커버는 어디에 놓았지? 못 찾으면 새로 사야 하나. 늘 두던 곳에 두었을 텐데 그 ‘늘 두던 곳’이 생각이 안나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선풍기를 닦다 보면 생각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제는 밤 10시쯤 덜 마른 수건을 세탁기에 넣고 2시간 반을 타이머로 맞춘 뒤 추가 건조를 돌려놓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새벽 2시 반에 눈을 떴다. 분명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세탁기에서 건조가 다 된 채 쌓여있는 수건의 이미지 같은 것들이 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비몽사몽 중에서도 세탁기에서 수건을 꺼내 개켰다. 스무 장 가까운 수건을 천천히 개키니 새벽 3시가 가까워져 왔다. 놀아주는 것이라고 오해한 한강이와 루나가 야옹거리며 발 주변을 맴돌았다. 수건을 개키는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새벽에도 눈이 떠진다.


왜 어떤 일은 새벽에도 눈을 떠서 하게 되고 어떤 일은 계속 미루게 되는 걸까, 나는 수족관 같은 스타벅스에서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타자의 추방을 다시 읽는다. 힘을 들여가며 읽어야만 읽히는 글이다. 나는 이내 지쳐서 잠시 눈을 감고 어제의 수건을 생각한다. 세탁기가 회전하며 위로 올라갔다가 툭 하고 떨어지는 덜 마른 수건들. 나는 그 회전을 생각하다가 깜빡하고 선잠이 든다. 어제 멈췄던 꿈을 잠시, 다시 꾼다.




image: https://unsplash.com/photos/-yCYVV8-kQ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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