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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May 26. 2024

가장 특정한 바다를 그대에게

밀린 집안일들을 끝내고 나면 어렴풋이 공허가 찾아온다. 해야 할 일을 지우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은 공백이 보인다. 시간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고 중력이 느껴진다. 중력을 따라,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얼마나 비가 오면 이곳도 저곳도 모두 물속에 잠겨 바다가 될까? 바다가 되면 이곳은 태평양일까? 바다 속에 산다면 집안일 같은 것은 없겠지. 씻을 필요도 청소할 필요도 없다. 바다가 모두 알아서 해줄 테니까.


바다를 처음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이 어디쯤 멈춘다. 일인칭 카메라 렌즈에 조막만한 팔과 손가락이 보인다. 엉금엉금 모래밭을 걸어가 바닷물에 손을 넣었던 첫 번째 기억. 발목까지 차오르던 차가운 파도. 눈부시게 파란 바다 위 하늘. 처음의 바다, 지금의 바다 모두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무섭다가도 한없이 관대하게 품을 내어준다. 파도, 그래 파도처럼.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모든 것을 가져간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 복잡하지만 바다를 생각하면 간단해진다. 바다와 하늘을 생각하면 그렇다. 저 멀리 우주를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바다에서, 하늘에서, 우주에서 숨을 쉬기는 어렵다. 나는 특정한 바다가 필요하다. 여느 바다 말고 내가 숨 쉬며 살 수 있는 그런 바다. 나에게 그런 특정한 바다는 어디에 있을까.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하얀 화면 혹은 까만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과 글을 잃고 묵묵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떠한 텍스트를 써도 죄가 됐다. 수사를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짧은 문장과 단어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 무겁지만 고양이를 기쁘게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벼워진다. 무릎 위로 올라온 고양이는 내 팔에 코를 파묻고 숨을 쉰다. 쌕쌕거리는 숨소리, 그르렁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몸. 따뜻해지는 공기와 함께 잡념이 조금 지워진다. 잡념이 지워지면 글이 조금 생긴다.


오랜만에 생긴 조금의 글을 가지고 이리저리 굴려본다. 파편 같고 먼지 같은 생각이 글에 달라붙어 그럭저럭 형체를 갖춘다. 그 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거울처럼 부끄러워진다. 짓누르는 마음은 중력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바다. 바다 속에 가면 한결 가벼워질 거야. 나는 가장 특정한 바다가 그리워진다. 욕조에 발을 담그고 파란 물감을 조금 풀면 바다가 느껴지려나. 여전히 무릎 위의 고양이만 따뜻하다.




image: https://unsplash.com/photos/K785Da4A_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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